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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국경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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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무사히 건넜을까/이 한밤에 남편은/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소금 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어 놓고/밤 새가며 속 태우는 젊은 아낙네/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파인(巴人) 김동환은 함경북도 경성 사람이다. 1901년 오늘 태어났다. 1925년 신문학 사상 최초의 서사시로 꼽히는 대표작 ‘국경의 밤’을 내놓으면서 조선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 작품은 두만강 근처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일제의 눈을 피해 강을 건너간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애타는 심정을 그려낸다. 우리 민족이 견뎌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과 나라를 잃고 헤매는 유랑민의 고달픔이 행간마다 선연하다.

파인은 중동학교를 나와 일본 도요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함북에서 발행된 ‘북선일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기자로 근무하며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가 ‘금성(金星)’이라는 잡지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9년부터는 종합잡지 ‘삼천리’, 순문예지 ‘삼천리문학’을 주재하면서 경영에도 손을 댔다.


일제강점기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듯 파인의 삶과 예술에도 빛과 어둠이 뚜렷하다. 파인은 데뷔 이후 한동안 암담한 민족의 현실과 고통을 노래함으로써 ‘신경향파’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향토적이며 애국적인 감정을 토로한 서정시를 많이 발표했다. 북방의 정서와 짙은 낭만, 향토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민요풍의 언어가 특징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성취는 1940년대에 활발히 전개한 친일 활동으로 빛을 잃고 말았다.


파인은 창씨개명에 순응하여 시로야마 세이주(白山靑樹)로 이름을 바꾸었다. 삼천리 사를 배경으로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전쟁 지원을 위한 시를 발표했다. 그의 친일 작품은 젊은이들에게 참전할 것을 촉구하는 시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1943)을 비롯하여 스물세 편에 이른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빠짐없이 파인의 이름이 보인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파인의 친일은 운명의 무자비함을 새삼 일깨운다. 그는 아버지 김석구와 어머니 마윤옥의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으되 사내 중에 맏이여서 장남으로 자랐다. 김석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를 오가며 장사를 하다가 파인이 어릴 때에 지린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 아비 죽인 원수를 위해 충성하다 친일의 오명을 쓴 시인의 행장이 애처롭지 않은가.


파인은 광복 후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공민권을 제한받았다. 한국전쟁 때 납북돼 1956년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했다. 그 후 평안북도 철산군의 노동자수용소에 송치되었다가 1958년 이후 사망했다고 한다. 2002년 8월 14일,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으니 또한 구슬픈 가족사가 아닐 수 없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 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 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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