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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ounter]울어 본 적 없는 울음이 고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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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근 첫 시집 〈반을 지운다〉

편집자인 시인 채상우는 이범근의 첫 시집 <반을 지운다>를 '수일한 서정시집'이라 했다. 그가 보기에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여느 서정시처럼 저 세계의 물상들을 자신의 비좁은 심경과 제한된 사유 속으로 끌어들여 함부로 탈색하거나, 첫 시집을 펴내는 시인들의 시가 흔히 그러하듯 한정할 수 없는, 그래서 도리어 편협한 비명과 위악의 전략적인 자기 고백으로 도색되어 있지 않다. 그의 문장은 담담하기에 오히려 그 속내를 감히 짐작하기가 두렵다. 또한 그의 수식 없는 시적 진술들은 하늘의 그물과 같아 시인을 포함한 이 세계의 모든 삶의 이력들에 내재한 사연들을 빠짐없이 불러 모은다."

편집자는 공명한다. 그에게 시집에 실린 첫 시의 마지막 줄, '아직 밥상에 없는 사람'(우기)은 단지 시인이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을 개인사의 울적한 서정적 편린에 그치지 않는다. 이 구절을 읽는 누구나 자신의 생과 몸에 새겨진 상처의 기원을 떠올리게 하며 그 현장으로 이끈다. 그곳에는 추천사를 쓴 시인 이영광의 말처럼 '늙은 어머니나 어린 고아나 떠난 연인'이 있으며 또한 교육 현장에서 마주한 학생들이 있는데, 그들은 시인과 한 몸을 이룬 채 '고통을 앓고 있다.'
"'고통을 앓고 있다'는 '고통스럽다'와 차원이 다르다. '고통스럽다'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형용사다. 이에 비해 '고통을 앓고 있다'는 동사에 가깝다. 이 점은 <반을 지운다>가 서정적 자아의 출처 없는 유사 고통을 토로한 바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고통의 주체로 정위한 자의 것임을 의미한다. 이범근의 시들은 차라리 '폭삭 내려앉아 생존자 하나 없는/사고 현장이 되고 싶어'(판타스마고리아 백화점)한다."

"젊은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제 뼈까지 다 울어 버린 살'은 바로 그렇기에 비로소 '물속을 흐르는 눈물'(과수원 수족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반을 지운다>는 요컨대 '한 번도 울어 본 적 없는 울음이 고인 자리'(눈동자를 간직한 유골을 본 적 없으므로)이며, '아무도 모르는 유일한/당신'(아무도 모르는)들의 '혼자 우는 모임'(혼자 우는 모임)이다." 그러니 이범근은 한국시에서 전대미문의 울음을 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영광은 추천하는 글에서 "그의 정신을 사로잡는 이들은 아픈 사람이거나 갇힌 사람, 심지어 없는 사람들이다. (중략) '나'의 고통과 남의 고통은 '얼굴'과 '얼굴의 반'(십일월처럼)처럼, 다시없을 '혜'와의 '뒹굶'(수메르)처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이 혼란과 신열의 지점에서 시집의 말들은 자주 몽유(夢遊)의 기록이 되거나, '혼자 우는 모임'(혼자 우는 모임)의 모순어법이 그렇듯 실어증의 중얼거림을 닮는다"고 적었다. 요즘 나오는 시집들을 쉽게 또는 편히 읽으려면 전문가의 조력이 필요하다. 좋은 해설을 곁들이면 시집 읽는 보람이 갑절이 된다.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해설에서 "이범근의 첫 시집을 읽으면서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스푸마토 기법"이라고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스푸마토(sfumato) 기법은 '연기 등이 사라지다, 없어지다'라는 의미의 '스푸마레(sfumare)'라는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물의 윤곽을 명확히 드러내는 대신 색의 연쇄에 따른 미묘한 변화를 통해 공간감을 강조하면서 화면에 깊이를 더해 주는 기법이다. 조강석은 "이 시집에서 본문과 제목의 관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면서 뚜렷한 윤곽 대신 흐릿한 이미지 연쇄에 의해 오히려 대상에 대해 새로운 깊이를 허용하는 언어가 이 시집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적었다.

이범근 시인 [사진=이준희]

이범근 시인 [사진=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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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근은 1986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고, 2011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얼룩은 다시 물기로 돌아갈 수 없다/물기가 다시 눈 속의 수심이 될 순 없다/사라진 것은 남을 수 없다는 당연의 세계에서/나는 사라진 것도 남은 것도 아닌 형체들을/오래 들여다보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사라져서 남은 헛것들에게 빚이 많다"면서 "스스로 발가벗었다"는 고백을 한다.

시집의 40쪽에 실린 열일곱 번째 시, '무화과'는 그가 쓴 다른 시처럼 묵지근한 심적 고통 속으로 독자를 몰아넣는다. 젊은 시인의 순정한 정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시적 진술이 가능하겠는가. 그의 작품들은 시를 쓰는 기술의 산물이 아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나 눈길을 사로잡는 근사한 언어로 독자를 꾀지 않는다. 그런 시들은 결국 시스템이 생산해낸 박리다매의 일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범근의 시는 진짜이거나 진짜에 가깝다.

'꿈에 이가 많이 빠졌다/오래 기르던 개를 끌어안는다/묽은 눈을 끔뻑이며/잇몸으로 내 손목을 문다/개에게 손목을 먹인다/종이학처럼 귀를 세운 채/어디선가 봉숭아 꽃잎 빻는 소리를 듣는 새벽/개의 눈동자에 묘목이 자란다/손목이 깊은 폐에 닿는다/깨진 질그릇들이 피에 엉겨 붙는다/세숫물에 노파의 틀니를 씻는 소녀 곁에서/꽃을 잃었다/거울 앞에서 크게 웃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헤아릴 길 없는 고통의 변주를 느낀다. 그는 꿈을 꿨다고 말하지만 그 꿈은 현실의 한복판 아니면 중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잠든 동시에 깨어 있으며 장주처럼 날개를 펄럭여 고통의 사해를 위태롭게 비행한다. 그의 고통은 21세기의 젊은 지성을 움켜쥔 내면으로부터의 폭력과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근원으로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저 1970년대의 위대한 시인 정희성이 쓴 '이곳에 살기 위하여'를 읽는 쓰라린 마음, 그 고통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공명하고 있다.

'한밤에 일어나/얼음을 끈다/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보라, 얼음밑에서 어떻게/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증오에 대해서/나도 알 만큼은 안다/이곳에 살기 위해/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봄이 오기 전에 나는/얼음을 꺼야 한다(후략)'

<이범근 지음/파란/1만원>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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