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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소녀의 방 /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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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사람은 조금 더 빨리 늙는 것뿐이다
소년의 말을 기억하는 소녀
둘만의 사랑을 속삭이던 방엔
바닥 가득 꽃이 피고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꽃을 가꾸고 있다
색색으로 피어나 생명을 이어 가는 죽음을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와
매일 되뇌는 만남의 기일을
피어난 어떤 꽃도 시들지 않고
젖과 꿀 가득 고여 있는
소녀는 이곳을 약속의 땅이라고 했다

소녀의 숨소리에 꽃잎 흔들리고
꽃가루 날려 하늘에 길 내면
소년은 반짝이는 길 따라 이곳을 찾아올 거라고
약속의 땅에선 어떤 불안과 의심도 없으니

꽃보다 예쁜 아흔 살의 수줍은 얼굴
멀리서 다가오는 계절의 발걸음 소리를 피해
언덕 끝 집 지하에 숨어 쌕쌕
노랗게 피어난 소녀의 설렘과 슬픔이
세상의 언덕을 비추고 있다

[오후 한詩]소녀의 방 /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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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변두리겠지. "언덕"이라니까. "언덕 끝 집 지하에 숨어" 살고 있는 소녀, 매일매일 "떨리는 손으로 꽃을 가꾸"는 소녀, 먼저 병들어 떠난 소년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소녀, 그 소년이 "반짝이는 길 따라"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믿는 소녀, "꽃보다 예쁜 아흔 살의 수줍은" 소녀. "아흔 살"? 아아, 할머니였구나. 할머니 혼자 살고 있었던 거구나. 어두컴컴한 지하 방에서,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할머니 홀로 적막하게 살고 있었던 거구나. 아니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할머니는 "색색으로 피어나 생명을 이어 가는 죽음"을 꽃피우고 있었구나. 그렇게 하루하루 죽음을 넘어서고 있었구나. 그렇게 "세상의 언덕을 비추고 있"었구나. 이제야 알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낮이나 밤이나 그토록 환했던 이유를. 그래, 저기 보이지 않는가. 저 언덕들마다 그리고 언덕을 향해 난 골목들마다 "노랗게 피어난" 할머니들의 "설렘과 슬픔"들이 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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