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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삶터]김혜수의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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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주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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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집단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건 달변가가 아니라 이들이다. 흔히 '말귀'라 하는 이 재주는 단순하지 않다. 뛰어난 말귀는 훌륭한 번역가의 능력에 가깝다. 하나의 문장은 나름의 역사를 매달고 발화되므로 언어 뒤에 숨은 그 맥락을 끄집어내는 힘까지가 말귀일 것이다.

나의 주변에는 놀랍도록 말귀가 밝은 사람이 몇 있다. 지복이라 여기는 동시에, 보고 배우기 위해 그들을 '임상'한다. 간추려보니, 우선 이들은 전반적으로 눈치를 보며 자랐다. 눈치란 일단 '불리'한 사람이 보는 것이므로 이들은 환영받지 못할 만한 어떤 이유를 지닌 채 성장한 경향이 있다. 스스로 기민하지 않으면 상황이 악화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맥락을 헤아려 버릇해온. 바꿔 생각해, 숨만 쉬어도 주변에서 어화둥둥 떠받드는 데 익숙했다면 적어도 이 능력이 길러지기엔 불리한 운명이었다 할 수 있다. 알 만한 분, 배운 분, 높은 분들이 외려 말귀에 영 소질이 없을 수 있다. 이때 ‘아랫것’들은 소통보다는 고통을 체험한다.
그런데 또, 열심히 눈치만 본다고 되는 건 아니다. 생의 어떤 불행의 요소가 눈치를 길러주는 건 맞지만 불행에 잠식당한 마음은 말귀를 방해한다. 자기연민에 갇힌 사람과 대화하기란 얼마나 지난한가. 자기를 연민하기란 또 얼마나 달콤한가. 말귀 밝은 이들은 그래서 자신의 불행이 세계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은 보다 처절하고, 보다 참담한 타인의 세계를 넘어다본다. 이를테면 문학 같은 것을 통해.

한 사람이 온 세상의 비극을 겪을 수 없어서, 문학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훌륭한 문학은 독자를 자기연민의 우물 밖으로 꺼내준다. 제 손톱 밑 가시에 절절매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렇게 넓고 깊은 진창이 세상에 많으니 엄살은 조금만 떨라며. 말귀 밝은 이들이 개떡을 찰떡처럼 알아듣는 건, 말 한마디를 천 개의 결로 헤아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보바리의 생과 조르바의 생을 함께 살면서 휘트먼의 생과 보들레르의 생도 건너본다. 그러고도 아직 못 살아본 생을 계속 궁금해한다. 궁금하니까 헤아리려 하고 자주 헤아리다 보니, 잘 헤아리게 된다.

그들은 비극을 알되 비극에 잡아먹히지 않는 사람들이다. 눈치를 능히 보지만 자신을 폐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점점 귀해진다. 오늘날 눈치 보는 태도는 그다지 미덕이 아니며, 자기 비극만 막대한 사람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비극을 딛고 당당해지라는 자기계발서는 호황이고 생의 명암을 시퍼렇게 비추는 문학은 불황인 걸까, 그래서.
배우 김혜수 씨가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외국 소설을 개인적으로 번역을 맡겨 읽을 만큼 문학의 열렬한 독자라는 기사를 보았다. 매해 큰 시상식을 진행할 때나 인터뷰를 보면서 소통에 능한 사람이라는 걸 느껴왔는데, 백번 납득이 되었다. 그녀의 번역가가 부럽다. 이 정도의 의지와 격조를 지닌 의뢰인을 위해 언어를 옮기는 일은 정말이지 즐거울 듯하다. 내가 갈고 닦은 말귀로 닿을 수 있는 이국의 세계를, 그녀에게 배달하는 일! 저마다 제 얘기만 떠들고 남의 말은 안 궁금한 세상에, 이런 ‘셀럽’이 있었다니. 왜 일찍이 번역을 공부하지 않았는지 통한이 밀려온다.

이윤주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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