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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명함이라는 것(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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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

낱말의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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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앉아있는 일은
얼마나 찜찜하고 쩔쩔 맬 노릇인가.

그때 쥐어든 명함 한 장은
괴한같은 사람을 드디어 믿을 만한
인격으로 만들어준다.
명함 속에는
대개 한 사람의 광채가 들어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간 광량(光量)과
그의 이마를 두드러지게 하는 조도(照度)가
기입되어 있다. 이름 주위에
서린 광배는, 그것을 내민 손을 번쩍이게 하고
고개를 숙이며 자기 소개를 하는 그 입을
자랑스럽게 한다.

명함에는 한 사람의 꿈이 날고 있고
한 사람의 현실이 낮은 포복하고 있다.
명함에는 안정감이 있고 무엇인가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자부가 있고
어깨를 나란히 하는 깨달음같은 것이 있다.

명함에는 그러나 미세한 그늘이 있다. 가끔 꼼짝없이
코 꿰어있는 삶이 거기에 박혀있기도 하고
가끔 그 이름을 날리느라 허풍 떨고 괴로워했던 기억과
그 이름 아래 눌리어 눈물로 걸었던 캄캄한 밤이 있다.
명함은 마치 검객들이 칼을 빼듯
날쌘 동작으로 꺼내 상대에게 자신을 먼저 알리는
영업 수단이다. 하지만 아무리 날쌔게 뽑아봤자
아무 것도 자르지 못하고 곧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빳빳한 휴지이기도 하다. 명함에는 다음에 또 연락해서
만나자는 약속이 있다. 혹시 성가신 전화가 올까
잠깐 걱정이 될 때도 있지만 대개 그 약속은 인사 치레이다.

복잡한 명함은 자신을 자랑할 말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랍을 정리하다가 쌓여있는 지나간 명함을
들여다보니 참 낯설다. 한때는
내 얼굴이었던 것, 내 이름이었던 것,
이제 초연히 어두운 구석에 들어앉아
버려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증명하며 사각의
형광 빛을 번쩍인다. 잠깐 들여다보며
옛 생각에 잠깐 잠겼지만
서둘러 휴지통 속으로 나를 버린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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