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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시마밤'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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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이와 비슷하지 않던가. 떠들썩한 24, 25일이 지나고 나면 캐럴송이 급속도로 머쓱해지고 성탄트리에 붙은 반짝이 별들도 금방 지겨워진다.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크리스마스가 없는 364일이 건조하게 대기하고 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은 그 하루 중에서도 저녁 무렵 몇 시간뿐이다. 해마다 10월31일이 다가오는 때가 되면 옛날 가수 이용이 어김없이 컴백해 목이 아플 만큼 '잊혀진 계절'을 부르지만, 그 이튿날만 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노래도 가수도 설렘도 사라져버린다. 노래 하나가 이토록 생명력이 긴 것도 경이롭지만, 그 노래의 가사 한 마디로 이 땅의 남녀들의 로맨틱한 제일(祭日)로 자리잡은 것도 인상적이다. 시마밤(시월의 마지막밤을 줄여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의 사연이라는 게 '우리는 헤어졌지요'이니, 그리 유쾌한 콘텐츠가 아닌데도 연인들이 이날에 사족을 못쓰는 이유를 나로선 알기 어렵다. 사랑이란 게 슬픔의 아우라 위에서 더욱 감미로워지는 거라서 그럴까.
문득 이용이 노래에서 말한 그 밤이 10월31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은, 시월에 헤어진 사람과 보냈던 마지막 밤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10월1일이거나 10월15일이거나 아무 상관없다는 얘기다. 우린 서둘러 그 마지막 밤을 31일로 해석한 뒤, 달력을 넘기는 그 쓸쓸한 날 하루를 기념하고는 서둘러 잊는 습관을 키웠다.

한편 이런 생각에 대해 혹자는 말한다. 그거야 당연히 중의법으로 쓰인 것일 거고…. 사실은 10월31일이 지닌 묘한 계절의 센스를 포착한 게 아니냐. 11월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처럼 숫자 모양새도 앙상하다. 시월은 미련처럼 나뭇잎을 움켜쥐고 있는 나무들의 형상을 떠올릴 수 있는 계절이다. 10월31일은 그 나머지 한 잎마저 뚝 떨어진 처연한 별리가 느껴지는 날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듯 하다. 기온도 뚝 떨어진다. 그래서 시월의 마지막 밤은 특정 사연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 기분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자아내는 절절하고 쓸쓸한 서정이 그 낱말에 착 달라붙었기 때문에 '얘기'가 된다는 주장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내겐 시마밤이 진짜 상처를 숨기고 있는 날이다. 청춘의 피가 끓던 무렵, 두 번째 여인과 헤어진 날이고, 그녀를 다시 만나려고 약속을 한 7년 뒤의 그날 밤에 나갔다가 여지없이 바람을 맞은 기억을 갖고 있다. 노래의 제목인 '잊혀진 계절'은 그래서 나를 더 아프게 한다. '잊혀진다'는 말은, 피동이 중첩되어 있다는 전문적인 지적이 있긴 하지만, 나로서는 아주 실감나는 표현이다. 사실 그 무렵에는 '잊혀진다'는 표현이 유행처럼 떠돌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대통령이 총에 쓰러진 늦가을과 그 이후 진행된 쿠데타의 가쁜 호흡이 지나간 기억들과 지나간 사람들을 서둘러 지우는 일을 익숙하게 했기 때문일까. 뒤숭숭한 시절이라 현실에 골몰하다보니 과거와 쉽게 단절되어 버리는 현상 때문이었을까. 관심과 기억에서 밀려나는 위험에 처한 것들이 지르는 아우성이 '잊혀진 계절'이란 표현 속에는 상처처럼 서성거린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진다. 나 또한 그녀에게 잊혀진 사람이 되기 싫었지만, 그 밤 이후에 상한 우유처럼 버려졌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이 노래에서 가슴을 후벼 파는 대목은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이다. 모든 이별에는 메아리치는 변명이 있다. 무표정으로 헤어진 뒤, 그때 미처 못했던 말을 이후 내내 곱씹는 절절한 심경이, 노랫말 속에서 두 문장의 질문으로 쏟아져 흐른다.
올해 시마밤은 잔뜩 움츠린 채로 보낸다. 갑작스레 찾아온 추위와도 같이 외투의 깃을 올리고 내가 방호해야할 것은 옛 상처들이 아니라, 당장의 삶의 몰려든 한기였다. 힘겨운 연애를 끝낸 것처럼 11월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시린 두 손을 포켓에 꽂은 채.
<향상(香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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