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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인사이드스포츠]역대 IOC 위원장 각양각색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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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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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 스포츠 대통령’이 탄생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지난 11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힐튼호텔에서 열린 제125차 총회에서 자크 로게의 뒤를 이어 위원회를 이끌어 갈 제9대 위원장으로 토마스 바흐를 뽑았다.

바흐 신임 위원장은 국제 스포츠계 동향에 관심이 있는 스포츠팬들에게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지난해 런던 올림픽 펜싱 종목에서 신아람의 계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적잖게 거론됐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플뢰레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바흐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에페 여자 단체전 은메달리스트인 클라우디아 보겔, 두 IOC위원은 독일인이다. 신아람의 상대인 브리타 하이데만이 독일 선수여서 판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의혹의 눈길을 받았다. 이는 IOC 위원은 IOC가 국가올림픽위원회(NOC)가 결성돼 있는 곳에 파견한 대표자란 사실을 간과해 벌어진 오해였다.

110명의 위원과 함께 동·하계 올림픽을 주관하며 세계 스포츠를 이끄는 새로운 수장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선출된 건 IOC에 또 다른 시대가 열렸단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1894년 IOC 창립 멤버는 13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탈리아, 영국, 러시아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노르웨이-스웨덴, 보헤미아 등 유럽과 미국,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출신의 명망가들이 만든 단출한 조직이었다. 그 사무총장과 초대 위원장은 근대 올림픽을 주창한 피에르 쿠베르탱과 성공한 사업가이자 작가인 드미트리오스 비켈라스가 각각 맡았다. 이들은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근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대회가 끝난 뒤 쿠베르탱은 IOC 제2대 위원장이 됐다.
바흐 신임 위원장은 수락 연설에서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로 감사의 인사말을 전하며 자신의 재능을 은근히 과시했다. 물론 조직을 순탄하게 이끌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앞선 수장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올림픽을 100년 이상 존속해왔다. 그들이 이룬 성과를 차근차근 짚어본다.

제1대 : 데미트리우스 비켈라스
올림픽의 부활과 IOC의 창설을 결정한 1894년 파리 회의에 그리스 대표로 참석, 제2대 위원장이 되는 쿠베르탱과 의견을 함께 했다. 제1회 대회를 파리에서 개최하려고 한 쿠베르탱의 계획에는 반대했다. 아테네에서 올림픽 부활의 첫 대회를 열어야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뜻을 이뤘다. 파리가 활동 근거지였지만 그리스인이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재임했다.

자크 로게 IOC 명예위원장[사진=정재훈 기자]

자크 로게 IOC 명예위원장[사진=정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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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 피에르 드 쿠베르탱
프랑스 귀족(남작)이다. 1896년부터 1925년까지 30년 동안 재임했다. 1883년 영국 방문에서 이튼학교 학생들이 럭비를 하는 장면을 보고 감명을 받아 교육에 스포츠를 도입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올림픽 부활의 생각을 굳힌 건 1889년의 일이다. 프랑스는 물론 영국, 미국 등에서 올림픽 부활의 당위성을 설파했고, 1892년 소르본느대학에서 벌어진 프랑스 스포츠연합 창립 기념식에서 부활을 제창했다.
제3대 : 앙리 발리에 라투르
벨기에 외교관 출신으로 1925년부터 1942년까지 재임했다. 1903년 IOC 위원에 선임됐고,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1920년 제7회 하계 올림픽을 자국 앤트워프로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1925년 프라하 IOC 총회에서 용퇴한 쿠베르탱의 뒤를 이어 IOC 위원장이 됐다.

제4대 : 요한 지그프리드 에드스트롬
스웨덴인. 1942년부터 1952년까지 재임했다. 학창 시절 육상 선수였다. 1912년 제5회 스톡홀름 하계 올림픽을 조직한 공로자로 1920년 IOC 위원으로 선임됐다. 1931년엔 부위원장을 맡아 라투르 위원장을 보좌했다. 1942년 라투르 위원장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위원장 직무 대리를 거쳐 1946년 로잔 IOC 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제5대 : 에이버리 브런디지
미국인으로 1952년부터 1972년까지 재임했다. 아마추어리즘의 수호자로 불린다. 재임 기간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한 ‘지한파’로 국내 스포츠 올드 팬들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1912년 제5회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육상 5종 경기와 10종 경기에 출전했는데, 5종 경기에서 5위를 했다. 1936년 IOC 위원이 됐으며 1952년 헬싱키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제6대 : 마이클 모리스 킬러닌
아일랜드인으로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재임했다. 기자, 영화 제작자 등 다양한 경력을 지녔다. 1952년 IOC 위원에 선임됐으며 재임 기간 올림픽 헌장을 수정해 프로 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제7대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내 스포츠팬들에게 가장 친근한 IOC 위원장이다. 1981년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제24회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쎄울’을 선언했다. 스페인 출신으로 1980년부터 2001년까지 재임했다. 1966년 스페인 체육장관에 올랐고, 그해 IOC 위원으로 선임됐다. 1982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후 여러 차례 내한했고, 1990년 제1회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2001년 7월 퇴임 뒤 종신 명예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제8대 : 자크 로게
벨기에인으로 2001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12차 IOC 총회에서 한국의 김운용을 제치고 IOC 위원장에 선출됐다. 출마 당시 공약은 올림픽의 규모 축소, 약물 추방, 인간성 회복 등이었다. 벨기에 요트 대표 선수로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와 1972년 뮌헨 대회,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등 세 차례 연속 올림픽에 출전했다. 럭비 선수로도 활동한 스포츠맨이다. 겐트종합병원 정형외과 과장으로 일하며 브뤼셀의 리브르대학교에서 스포츠 의학을 강의하다 1991년 IOC 위원에 선임됐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등 5개 언어를 구사한다. 이번 총회에서 명예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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