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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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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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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이 미장원에서 자고나온 며칠 후, 하림은 낡은 아반떼를 몰고 윤여사 고향으로 가고 있었다. 윤여사 고향 M읍은 서울에서 서북쪽으로 한시간여를 달리면 닿는 곳이었다. 다시 거기서 국도를 버리고, 작은 시골길과 농노를 따라 삼십여분 더 들어가면 된다고 윤여사가 전화로 가르쳐주었다. 가다가 모르겠으면 핸드폰을 하라고 친절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아직 겨울기가 남아있는 산과 들이 가로수 사이로 비쳤다. 높은 산 응달 쪽 비탈에는 채 녹지 않은 눈이 허옇게 버짐처럼 남아있었고, 벌어진 창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제법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계절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지 싸리 비짜루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같이 앙상한 가로수 가지 끝에서 언뜻언뜻 희미한 봄의 기운이 느껴졌다.

오후 세시. 국도를 달리는 동안, 지나가는 가로수만큼이나 많은 생각들이 하림의 머리 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우선 혜경이 문제만 해도 그렇다. 그날 같이 자면서 혜경이 고백처럼 뱉어놓았던 말이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너무 쉽게 생각했는데 가면 갈수록 그게 아니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녀 속에서 죽은 남편, 양태수의 존재가 더욱 강고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쌓아놓은 추억의 성, 첫사랑의 기억에서 혜경은 결코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녀에겐 이미 자기 말대로 자식 하나면 충분한 딸 은하가 있었고, 한번의 결혼으로 충분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하림이랑 다시 결혼한다 해도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리란 보장도 없을 것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차라리 이 남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선배 언니가 기다리는 아프리카로 달려가서 인생의 차수변경을 시도해보는 것이 훨씬 짜릿한 일일는지도 몰랐다. 자기 말대로 고생이야 좀 한다하지만 이대로 뻔히 늙어가는 것보다야 더 낫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하림 자기는 뭔가? 닭 쫒다 지붕 바라보는 개 신세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자기가 구상하던 미래에는 늘 혜경이 함께 있었다. 혜경이와 함께 먹고, 자고, 햇빛이 들어오는 천장을 바라보며 아침에 함께 눈을 뜨는 것, 그리고 은하랑 함께, 가능하면 둘이 닮은 아이를 하나둘 더 낳아 유치원 보내고, 학교 보내고, 알콩달콩 남들 속에 섞여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그가 꿈꾸던 혜경과의 미래였다.
그것을 위해 하림은 얼마 전 혜경이 몰래 이층 영산철학원 영감을 만나 그 옆에 새로 난 사무실 자리도 둘러보고, 자기 이름으로 논술학원을 열어볼 궁리도 해보았었다. 혜경이의 미장원과 자기의 논술학원, 그럭저럭 어울리는 한쌍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란히 아침에 집을 나서, 나란히 밤에 집으로 들어간다. 일견 너무나 소박한 꿈이었지만, 그래도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런 일상의 소박함 속에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힘, 그게 사랑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녀는 그게 아니란다. 그게 행복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자기는 그렇게 덧없이 모래시계처럼, 늙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혜경이, 그녀는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던가.
하림은 스쳐가는 차창 풍경을 보며 혼자 생각에 젖었다. 생각한다고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떠오르니까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떠올라서 또 생각하는 것 뿐이었다.

이윽고 국도가 끝나고 윤여사가 가르쳐 준대로 ‘행화리’라 씌여진 입간판이 나왔다. M읍으로 들어가기 전 좌회전 길이었다. 행화리는 살구골의 행정상의 이름이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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