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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모천회로(母川回路)

최종수정 2018.06.29 07:35 기사입력 2018.06.29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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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허진석 문화부 부국장

"고개 숙여 존경하는 시인이여. 이렇게 하여 나는 당신의 후예임을 알아내고 한없이 기뻐했습니다. 이제 내 운명에서 풀리지 않았던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의 행동과 결심으로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 왔던 나는 결국 많은 면에서 당신의 길을 따랐던 것입니다."

러시아 소설가 아나톨리 김이 1990년 2월3일자 동아일보 17면에 기고한 에세이다. 제목은 '내가 한국인입니까 러시아인입니까'이다. 그는 '재소작가(在蘇作家)'로 소개되었는데, 1939년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 3세다. 1973년 문단에 데뷔해 1980년대 러시아 문단의 대표 작가로 주목받았다. 1984년 발표한 '다람쥐'로 모스크바예술상, 톨스토이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받은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될 정도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아나톨리 김은 1989년 9월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나라를 방문한다. 그해 9월26일부터 10월1일까지 열린 세계 한민족 체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이 행사는 수원을 비롯한 경기도 12개 시군에서 분산개최된 전국체육대회와 함께 열렸다. 그는 소련대표단 147명과 함께 하바로프스키에 집결, 서울에서 보낸 전세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통해 25일 오후 9시에 입국했다.

이 해에 그는 우리 사회에 집중적으로 소개됐다. 9월11일 동아일보 특파원 연국희가, 10월4일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그를 인터뷰했다. 아나톨리 김은 연 특파원과 인터뷰하면서 "고려혼(高麗魂)이 내 작품의 뿌리다. 조국을 등진 삶의 응어리가 핏속에 흐른다"고 했다. 신문 인터뷰와 방송 출연이 잦았지만 아주 인상적인 대목은 러시아로 돌아간 뒤에 쓴 에세이에 집약됐다.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친구이자 번역가인 김근식 교수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편지를 읽은 그는 '놀라움과 형언키 어려운 기쁨을 체험'한다. 거기에는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치'에 대해 씌어 있었다고 한다. 진천 김씨 종친회에서 아나톨리 김이 김시습의 후손임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아나톨리 김은 전율하며 써내려갔다. 핏속에 흐르는 그의 본질 어떤 부분에 사로잡혀 고백한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영감 뿐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삶의 수단이지만, 삶 그 자체는 후에 그 삶이 끝났을 때 그 삶에 대해 내려지는 평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가장 소중하고 부드러운 것, 가장 심오하고 영적인 것, 가장 진실되고 지속적인 것은 한 인간에게 민족적인 기원과 연관되어 있는 법입니다."

아나톨리 김의 고백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가장 정채(精彩)가 느껴지는 곳은 맨 마지막 줄이다. 그는 "내가 당신과 한 핏줄이라는 놀라운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어이하여 나는 울적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것일까요"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는 오직 아나톨리 김만 대답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매월당이 살아 돌아와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연어는 바다에서 살다가 번식할 때가 되면 고향을 찾아 계곡과 폭포를 거슬러 오른다. 우리는 그 내력을 짐작만 할 따름이다. 더러는 별자리, 더러는 지구의 자성(磁性)이 작용했으리라 추측한다. 유력하기로는 태어난 곳의 냄새를 기억했다가 용케도 그 길을 되짚어 오른다는 설이 최고다. 애틋하지 않은가, 다음 세대를 기약하며 제 숨을 거두는 일. 태로 돌아가 종생하는 길.

지난 한 주 남북은 끊긴 철도 이을 일로 지혜를 모았다. 나는 결과가 몹시 궁금했다. 그 길은 우리가 잊었던 여정, 굽이굽이 강철의 모천회로(母川回路). 세월을 짐진 채 늙어버린 실향인들이 무리 지어 그 길을 오르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 또한 거기에 있어, 얼굴을 높이 들고 허공에 호흡을 버무려 고향의 흙냄새를 흠향하리니. 그 비릿하고 애틋한, 피의 냄새!

문화부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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