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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의 프레임]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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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도 없고 어두운 탓에 고감도 필름을 써서 입자는 굵었고 심도는 낮아 테크니컬적으로는 훌륭한 사진을 얻지 못했다. 1995 백남준. (사진제공=조아조아스튜디오)

조명도 없고 어두운 탓에 고감도 필름을 써서 입자는 굵었고 심도는 낮아 테크니컬적으로는 훌륭한 사진을 얻지 못했다. 1995 백남준. (사진제공=조아조아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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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소호거리 한가운데 서있었다.


그날 누구를 만나기로 했는지, 무엇을 했는지 따위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뉴욕도 처음이지만, 소호라니…. 내가 소호에 서 있다니 꿈만 같았다. 그 당시에도 벌써 소호는 끝났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아티스트의 거리였다.

약속된 이는 그 거리에 나를 세워둔 채 나타나지 않고, 스마트폰은커녕 2D폰도 내 손아귀에는 없었으므로 난 하염 없이 소호 사람들을 구경 할 수밖에. 카메라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음을 조금 후회하며, 어떤 카메라든 늘 하나는 지니고 다니는 버릇이 있는데…. 그땐 왜 그랬을까? 뭐 때문에 카메라를 잊고 나왔을까?


그 순간이었다. 카메라가 내 손에 없음을 평생 후회하는 순간으로 남게 한 것은. 훤칠한 흑인 요양사가 밀고 있는 휠체어를 탄 백남준 선생을 맞닥뜨렸다!


그 순간, 몇 년 전 백남준 선생을 찍은 일이 떠올랐다. 전시 일정으로 한국에 들어온 백남준 선생을 어렵게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고 기자에게 연락이 왔고 우리는 선생이 있다는 미술관으로 갔다. 그러나 스케줄을 관리하는 누군가 우리는 리스트에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들려줬다.

그러나 '무대뽀' 조선희가 알겠다며 그냥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을 그냥 따라 다니게만 해달라, 어떤 포즈를 취해달라 요구하거나 시간을 뺏는 일은 없을 거다 등등 막무가내로 졸라 동행할 자격을 얻었더랬다. 선생이 인사동 어디께서 밥을 먹으며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난 마치 선생이 내 카메라 앞에 앉아있는 양 찍는 것이 나의 미션이었다!


조명 장비는커녕 달랑 카메라 하나에 100㎜ 렌즈 하나 가진 나는 주변 모든 소음과 다큐멘터리적 모든 요소를 잘라내고 나전칠기 장농 문을 배경으로 그분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조명이 없고 어두운 탓에 고감도 필름을 써서 입자는 굵었고 심도는 낮아 테크니컬적으로는 훌륭한 사진을 얻지 못했다.


내가 평생 언제 다시 만날 수 없을 백남준 선생을 잘 찍지 못한 그 아쉬움은 늘 마음 한 쪽에 남아 있었는데…, 소호거리에서 딱 맞닥뜨린 것이다. 선생에게 죄송하지만 사진가로서 욕심나는 장면인 건 확실했다. 비주얼적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푼크툼(punctum)을 지니고 있는가? 소호거리가 뒤로 쫙 뻗어있고, 훤칠한 젊은 흑인 요양사가 미는 휠체어에 앉은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라….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가락이 까딱댔지만, 근데 카메라가 없다. 누군가 연출하지 않고는 만나기 힘든 이 결정적 순간에 난 카메라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


사진 촬영 중인데 카메라가 없거나 셔터가 눌러지지 않는 악몽을 지금도 가끔 꾸는데 아마 이 순간부터가 아니었을까? 일회용 카메라라도 사서 찍었어야 했을까? 나의 뜻을 잘 설명드리고 약속을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별의별 후회가 수년간 내 심장을 콕콕 찔러댔다. 내가 사진가로 사는 동안 가장 후회되는 순간을 꼽으라면 이 순간이다. 당장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못한 소호거리에 멍청히 서있던 스물여덟의 조선희.


소호거리의 그 장면은 20여년이 된 지금도 내 머릿속에 사진 한 장처럼 선명하게 찍혀있다. 그 장면이 지금은 그때보다 더 대단한 사진으로 편집되었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아름다운 빛과 톤, 선생의 표정, 그 뒤로 펼쳐진 소호거리 그리고 백그라운드에 걸렸을 지나다니는 소호 사람들! 그렇게 그 장면은 영원히 나만의 사진 한 장으로 남았다. 에디션 넘버 1/1.


조선희 사진작가 / 경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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