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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칼럼] 대학의 죽음, 지식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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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편집위원

이명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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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 항쟁이 무엇보다 압도적으로 보여준 것은 '적극적 시민'의 출현이었다. 시민의 힘으로, 그것도 지극히 평화적인 저항으로 최고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사건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쾌거였다. 그것은 위대한 '주권자 국민'의 힘의 발견이었다. 그것이 이번 사태의 밝은 '빛'이었다면 그 뒤에는 우울한 그늘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식인의 부재, 지식인의 좌절이 유난한 장면들로 비쳐졌다. 정권의 부도덕과 범죄에 '부역'을 했던 이들 가운데는 대학교수 출신들이 많았다. '완장'을 휘두르며 권력을 휘둘렀던 그들은 청문회나 검찰 조사를 받을 때는 잡범보다 못한 구차함을 보였다.

애써 그것을 일부 타락한 교수들의 탈선이라고 해 두자. 그러나 이화여대 사태가 극명하게 드러내듯 대학은 체계적이며 계획적으로 유린되고 있다. 대학이 정부의 정책자금 따위에 의해 순치되고 있는 것에 지금의 대학의 현실이 집약돼 있다. 학문의 전당이며 지식인의 산실인 대학이 '학문'과 '이상'과 '진리'라는 말 대신 '사업비'와 '프로젝트'와 '수주' 따위의 말들로 덮여 있는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었다.
'야성(野性)'을 잃어버린 대학은 광채를 잃어버린 빛이며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다. 종교의 타락과 함께 대학의 타락으로 우리 사회는 빛과 소금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대학은 사회의 고민을 맡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고민이 돼 버렸다. 빛과 소금을 상실한 대학, 고민하지 않는 지식인이 지금의 위기를 부른 한 원인이 된 것이다. "학내 사태와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지나면서 '도덕의 힘'에 관한 무력감이 철학 선생인 내게 엄습해왔다"고 토로한 이대 교수협의회 공동회장 김혜숙 교수의 '교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자문은 오늘의 위기의 대학, 무력한 지식인들 모두에게 던지는 무거운 질문이다.

위기의 대학, 무력한 지식인에 참담함이 드는 오늘, 그러나 바로 어제 발간된 한 권의 책이 한 지식인의 고투, 그로써 하나의 작은 '빛'을 보여주는 듯하다.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의 17년 만의 전면개정판인 이 책은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에 대한 번역과 주석, 연구서를 묶은 것이다. 이 책의 역저자인 박상익 교수는 개정판을 내느라 참고문헌으로 단행본만 500~600권, 논문 300여편을 읽어냈다. 이 방대한 자료의 구입에만 '중형승용차 한 대 값'이 들었다고 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사회에서 이런 책 내는 건 완전 바보짓"이지만 그로 하여금 이 바보짓에 매달리게 했던 건 "이 땅에 태어났으니 무언가 남기고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자신의 전공이기도 하지만 그의 이 역작이 밀턴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 지금의 상황에서 더욱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밀턴은 30대 중반에 뜻밖의 질병으로 인해 두 눈의 시력을 잃는다. 그 후 왕정복고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의 말년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밀턴이 '실낙원'과 '복낙원''투사 삼손' 등 3대 걸작 서사시를 집필했던 건 그 같은 절망과 시련 속에서였다. 고난과 역경의 단련이 위대한 작품을 낳았다. 밀턴뿐이겠는가. 베토벤의 '운명을 두드리는 소리'는 귀가 먼 뒤의 절망 속에서 나왔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위업도 18년 유배생활의 시련 속에서 이룩됐잖은가.
대학은, 지식인은 죽었다. 그러나 죽어야 산다. 다시 그러나, 다시 살기 위해선 죽었다는 것을 먼저 자각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절망과 나락에서야 다시 살아나는 회생의 기회를 마련하고 있듯 대학은, 지식인은 지금 철저히 스스로 죽어야 한다.






이명재 편집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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