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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이름, 피의 기억(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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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는 긴 시간을 흐른
피의 기억이 들어있다.
나의 피는 어디서 생겨났는가.
내 이름 석자 중에서
두 글자는 그 피의 흐름을 기재해놓은 것이다.

이(李)라는 글자는 성씨(姓氏)라고 말한다.
성씨는 출생의 혈통을 나타낸 말이며
한 혈통을 잇는 피붙이 전체의 칭호이기도 하다.
이씨들은 맨처음 이 성을 지닌 남자를 시조로 하여
대대로 내려오는 단일계통의 혈연집단이다.
씨족이란 그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름 중간에 들어있는 상(相)자 또한
온전히 내 고유의 것이 아니다.
이씨들은 다섯 가지의 이름계열을 만들었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보자면
규(圭)-종(鍾)-우(雨)-상(相)-희(熙)이다.
이것은 토(土)-금(金)-수(水)-목(木)-화(火)가
서로 물리며 윤회하는 양상이다.
물론 저 5행은 다섯 개의 별이다.
즉 토성, 금성, 수성, 목성, 화성이다.
그리고 우리 곁에 존재하는
흙과 쇠와 물과 나무와 불을 상징한다.
저 다섯 개가 이어지는 방식은
아비가 자식을 살리는 것을 함의한다.
즉 흙은 쇠를 품고 살리며
쇠는 물을 만들어내며
물은 나무를 살리며
나무는 불을 피운다는 의미다.

이씨들은 이름 속에 아비가 자식을
키우고 살려야 하는 뜻을 숨겨놓았고
다섯 개의 항렬을 체인처럼 연결해놓았으며
그것이 다섯 개의 행성처럼
영원히 물려 돌아가도록 설계해 놓았다.
이름은 한 존재를 공간적으로 기표하는 것 이외에
시간적으로 기표해놓은 것이기도 한 셈이다.

내게 고유한 이름은 국(國) 한 글자이다.
이 글자 또한 얼마나 강렬한가.
국(國)은 자기의 땅을 창을 들고 지키는 것을
의미했다. 큰 입 구(口) 속에 들어있는
혹(或)자가 원래는 나라 국의 전체 글씨였다 한다.
혹시 외적이 쳐들어올까를 살펴야 하는
그 마음이 글자에 전이되어
이 글자는 '혹시'라는 의미로 굳어졌다.
그래서 그 밖에 크게 에워싸서
글자로 내부를 지키는 형상이 되었다.
내 이름 속에는 큰 무엇인가를 지키는
긴장과 불안이 들어있다.
창(戈)을 들고 사위를 경계하는
초병의 마음이 국(國)자의 정체이다.
내 이름에 이런 글자를 넣어준 뜻은
내가 이렇듯 뭔가 큰 것을 위하여
늘 고심하고 조심하며 살라는 것이었던가.

성씨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성(姓)은, 여자(女)가 낳았다(生)는 의미이다.
씨(氏)는, 남자가 낳았다는 의미이다.
우리 말의 씨(種)와도 비슷하다.

내가 아버지와 같은 이씨인 것은
이 사회가 부계혈통임을 가리킨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은 정(鄭, 어머니)이요
씨는 이(李,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원시사회에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지배적 위치였다고
한다. 이를 모계사회라고도 하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여성의 채집(식물) 행위가
남자의 수렵(동물 포획)보다 훨씬 안정적이었기에
채집된 음식을 중심으로 권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대엔 1대1 짝짓기 개념이 없었고
다중혼인이 일반적이었다. 자식이 생겨나면
아버지가 누군지 현실적으로 가리기 어려웠다.
다만 어머니가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있었기에
어머니의 성(姓)을 따랐다. 이때 성(姓)이란 뜻은
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존재 증명이다.

이후에 정복행위가 빈번해지고
남성의 무력이 사회 질서의 기본이 됨에 따라
혈통에 대해서도 다른 개념이 생겨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는 씨(氏)를
이름 속에다 기록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누군가를 아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여성의 정절이 요구되었고 일부일처제가
핵심적인 사회시스템으로 뿌리내렸다.

이(李), 한 글자에는 원시시대의 고민과
남자들의 오랜 투쟁이 숨어있는 셈이다.
새해 들어, 문득 내 존재의 연원이 궁금하여
이름을 곰곰히 씹어보며
늘어놓는 잡생각이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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