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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세상 '베이비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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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만들어진 이후 334명의 아기들 거쳐…매년 증가 추세
'입양특례법 재개정 필요' vs '베이비박스가 유기 조장' 의견 팽팽
"미혼모에 대한 인식 등 사회적 선입견부터 먼저 없애야"


[아시아경제 이혜영 기자]# 18살 앳된 두 고등학생이 탯줄도 자르지 않은 핏덩이를 안고 문을 들어섰다. 아이와 부모 모두 양수와 피가 온 몸에 묻어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아기의 엄마는 열달동안이나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었지만, 부모도 스승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모님이 출근한 후, 집안 화장실에서 그렇게 두 십대는 엄마 아빠가 됐다.
"아이를 낳은 그 몸을 해서 어떻게 이 언덕을 올라왔는지 모르겠어요"

지난 월요일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 목사는 청소년 부부가 데려온 아기의 탯줄을 직접 잘랐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던 축복의 순간이었지만, 어린 부모는 그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깊은 고민을 해야했다.

'우리가 과연 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두 청소년과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엄마 혹은 아빠 혹은 부모가 또 하나의 선택지로 고민하는 '베이비박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작은 교회의 담벼락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베이비박스는 부모들이 유기한 아기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난 2009년 12월 이종락 목사가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주사랑공동체교회에 설치된 것이 유일하지만 독일(100개), 체코(45개), 폴란드(45개), 슬로바키아(28개), 이탈리아(8개) 등 유럽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 신림동 주사랑공동체교회 담벼락에 자리한 베이비박스

▲ 신림동 주사랑공동체교회 담벼락에 자리한 베이비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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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박스 문이 열리면 벨 소리가 교회 내부에 울리게 된다. 이 목사와 그의 아내는 이 소리를 듣고 아이를 데려온다. 아이에 대한 기록을 위해 밖으로 나가 부모와 대화를 나눌 때도 있지만, 잡을 새도 없이 황급히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도 많다. 아기들은 교회에서 일정기간 보호받다 구청 사회복지과를 통해 또 다른 시설로 보내지게 된다.

베이비박스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지난 4년동안 334번 문은 열리고 말았다. 2010년 4명, 2011년 37명, 2012년 79명에서 올해는 10월 기준 214명이 이 작은 공간을 거쳐갔다.

이 목사는 베이비박스에 놓이는 아기들이 증가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입양특례법'을 지목했다. 입양특례법은 보건복지부가 아동의 권익과 복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법을 개정해 지난해 8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출생신고 의무화, 입양숙려제, 가정법원의 입양 허가제 등 친부모에게 양육될 권리를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이 목사는 "입양특례법이 시행된 이후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기는 258명으로 개정 이후 오히려 빠르게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기들이 왜 유기되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현실은 무시한 채 규제만 강화해 더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법 개정에 앞서 어떤 이유로 아이를 유기하는지에 대한 접근과 노력이 선행됐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외 입양아동의 숫자는 2010년 2475명, 2011년 2464명 수준을 보이다 지난해에는 1880명으로 감소했다. 반대로 경찰청이 입계한 유기아동 수는 2010년 69명, 2011년 127명에서 지난해 139명으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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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아는 줄고, 유기아동은 늘고 있는 상황에 대한 해석은 첨예하게 엇갈린다. 입양특례법 재개정을 요구하는 쪽은 아이를 키울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처지의 사람들이 유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하고 반대쪽은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며 오히려 베이비박스 같은 무허가 시설이 부모의 책임감을 덜어 유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목경화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는 "베이비박스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무책임한 부모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며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처벌 대상인 영아유기자들을 오히려 보호해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시설이기 때문에 향후 아이들이 뿌리를 찾고 싶어도 제대로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법과 현실이 한 두단계 정도 떨어져 있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지만 지금의 입양특례법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며 "또 법이 자리잡을 동안에는 생명이 희생돼도 괜찮다는 건지 정부에 묻고 싶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어 "52명의 아이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고, 시설로 보내진 이후 찾아간 사례를 포함하면 100명이 넘는데 여전히 우리에게 유기를 조장한다는 시선을 보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유기아동이 늘고 있는 것을 입양특례법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증가 추세에 있는 만큼 구체적인 방안 마련을 위한 검토를 하고 있으며 이들을 비롯해 학대받은 아이들을 위한 통합적인 관리 시스템을 마련하는 방법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입양특례법과 베이비박스에 대한 인식은 엇갈렸지만, 양측은 '법'보다는 우리사회의 '인식'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미혼모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선입견,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 보장, 청소년의 성 의식에 대한 제대로 된 접근과 정책 등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베이비박스라는 작은 공간안에 우리 사회가 처한 많은 문제들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는 출산을 장려하면서 미혼모가 낳은 아이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이중적인 태도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목 대표 역시 "일반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냉대를 보내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 우선"이라며 이를 위한 정부의 실질적인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혜영 기자 itsm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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