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시유세단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통치해야 할 필요성을 홍보하는 것이 목적이었죠. 한 마디로 여론몰이를 위한 일제의 선전도구였습니다.
이들의 활동자금은 통감부와 당시 내각에서 지원했습니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도 이 단체에 400원을 기부합니다. 이 후에도 자금이 달릴 때면 정부에서 거금을 지원했습니다. 이 같은 물적 지원에 힘입어 유세단은 당시에는 희귀했던 유성기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권력의 비호 하에 혹세무민(惑世誣民)을 한 것이죠.
정부는 각 도에 훈령을 보내 유세단원을 후히 대접하라고 지시했고 이완용도 유세단원의 활동에 적극 협력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신광희는 군인이었는데 친일 신문인 '대한신문'의 사장을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살해 됐을 때 이토를 추도하기 위한 국민추도대회를 준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예종석은 용달회사로 큰 돈을 번 인물로 3.1운동 때는 시위 반대 운동을 맹렬히 펼쳤습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지원병제도 제정축하회를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 예종석을 '썩은 달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국시유세단은 1년 이상 활동하다가 한일 합방 이후인 1910년 9월 13일 정식 해체되었습니다.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itb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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