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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②일자사(一字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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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상이 죽은 뒤 김부식은, 그 앞에서 늘 기죽었던, 자신의 경쟁자가 없어진 점을 흐뭇해(!)하면서 봄날 계곡에 앉아 느긋하게 한 수 읊는다. '유색천사록 柳色千絲綠 도화만점홍 桃花萬點紅(버들빛 천 가지가 푸르며/복사꽃 만 송이가 붉도다).' 그런데 이때 공중에서 홀연 정지상이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따악' 때린다. 흠칫 놀라는 사이, 허공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덜떨어지고 부실한 부식아. 버들빛이 천 가지이고 복사꽃이 만 송이인 걸 세 봤니? 세 봤냐구? 어떻게 알아? 자기도 모르는 걸 시라고 쓰고 앉았냐?" 호통을 친 뒤에 정지상은 시를 바로잡아 읊어 준다. '유색사사록 柳色絲絲綠 도화점점홍 桃花點點紅(버들빛은 가지가지 푸르고/복사꽃은 송이송이 붉도다).' 천 가지는 '가지가지'로 바뀌고 만 송이는 '송이송이'로 바뀌었다. "이렇게 해야 리얼리티가 살아나고 음악도 생기를 얻는 데다가 너처럼 뻥을 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이 말을 마친 뒤 정지상은 혀를 쏙 내밀고는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한 등반가가 97일간의 장정 끝에 북극의 워드헌터곶에서 동료들과 상봉했을 때, 그는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기쁨으로 녹아내린 북극상봉." 나중에 올라가 판을 제작하면서 보니 제목은 이렇게 고쳐져 있었다. "기쁨도 얼어붙은 북극상봉." 기쁨이 녹아내린 것보다 기쁨이 얼어붙은 것이 훨씬 현장감이 있고, 조사 '도' 하나에 절절함이 더 깊어지는 표현이었다.
교연이란 중이 있었다. 한 승려가 찾아와 시를 한 수 지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차파함제택 此波涵帝澤 무처탁진영 無處濯塵纓(이 물결에도 임금의 마음 스며 있으니/먼지 묻은 갓끈을 씻을 곳이 없구나).' 교연은 차파의 "파"가 별로라고 지적해 주며 다른 말을 찾아보는 게 어떠냐고 말한다. 이에 승려는 싫다면서 시를 가지고 절을 떠나 버렸다. 이때 다른 스님이 "참 좋은 시였는데 한 글자를 고집해 망치다니…"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교연은 "걱정 말게. 그는 곧 돌아올걸세"라고 말한다. 과연 잠시 후에 떠났던 승려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는 약간 들뜬 어조로 말한다. "스님이 과연 옳았습니다. '파(波)' 대신 '중(中)'자를 쓰면 어떻겠습니까?" 그때 교연은 자기의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그 속엔 승려가 떠나고 난 뒤에 먹으로 적은 듯 "중(中)"자가 아직 덜 마른 채 쓰여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파(波)는 함(涵:젖을 함)자와 택(澤:은혜ㆍ연못 택)자에 이미 암시되어 있고 뒤 구절의 탁(濯:씻을 탁)에도 드러나 겹치는 바 되었고 음악적인 이음새 또한 거칠어서 옥에 티였던 걸 둘이 모두 알아챘던 셈이다.

어느 이른 봄, 동백꽃 숲이 좋은 대흥사와 선운사를 소개하는 지면에서였다. 찍어 온 사진을 보니 입술연지처럼 붉은 꽃이 삭막한 겨울 배경 한 가운데서 농염하여 시흥을 자극한다. 그는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동장군 몰아내는 핏빛 꽃망울." 동장군은 겨울을 의인화한 말이니 몰아낸다는 표현이 걸맞으리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제목은 이렇게 고쳐져서 나왔다. "동장군 옷고름 푸는 핏빛 꽃망울." 추위의 겹옷을 벗기는 장면과 봄의 질탕한 유혹과 동장군과 꽃망울이 정사를 벌이는 듯한 메타포가 감칠맛 나게 피어난다. 아, 선배.

옛 시인들은 시안(詩眼ㆍ시의 눈)이라 불리는 한 글자를 잡아내 화룡점정해 주는 사람을 일자사(一字師)로 극진히 모셨다. 한 글자를 고쳐 주시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이 시를 쓸 수 있지만 늘 막히는 건 한 글자의 허리를 펴 주지 못하는 탓이라고 한다. 시가 퍼드덕거리며 헤엄치며 뛰쳐나올 수 있는 한 글자의 생기를 찾아내는 빼어난 안목을 세상의 시인들은 동경해 왔다. 마침내 하는 일이 열 글자 안쪽의 문장을 다듬는 일이다. 제 딴엔 뼈를 깎고 심장을 태우지만 한 글자의 간질간질함에서 맴돈다. 그럴 때 그 기상의 옹색함을 시원스럽게 펴 주는 일자(一字)데스크가 존재하고 있음을 고마워해 왔다. 한 글자의 동맥경화를 풀어 주는 저 시안을 나도 언젠가는 내 코 위에 붙여 문자들 앞에서 환해지는 날이 있어야 할 텐데!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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