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산업단지<1>울산·창원 산업단지
[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4000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1962년 2월3일 울산 남구 매암동 납도마을. 인구 8만명의 작은 시골의 적막함을 쩌렁쩌렁한 마이크 소리가 깼다. 고 박정희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날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에서 치사를 통해 울산국가산업단지의 시작을 알렸다. 국내 최초 산업단지의 첫삽을 뜬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울산은 연간 수출액 1000억 달러가 넘는 세계적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단일 도시로 이같은 수출액을 기록한 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하다.
◇척박한 땅에 기틀을 심다 = 일본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1950년대를 딛고 1960년대부터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핵심에는 '산업단지'가 있었다. 항만과 배후용지, 공업용수 등 모든 면에서 '천혜의 조성지'였던 울산이 첫 시험대에 올랐다. 농업ㆍ어업 종사인구가 전체의 70%를 넘어섰던 울산읍은 1962년 기공식 직후 시로 승격됐다. 초기 단계인 1962년부터 66년까지는 정유공장 건설과 공장부지 다지기가 주로 진행됐다. 1963년에는 미국 걸프석유회사에서 25% 지분투자를 받아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 공장이 세워졌다.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시초를 알린 순간이었을 뿐 아니라 글로벌 에너지 메이저가 대한민국에 진출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67년부터 5년간 2차 개발 기간에는 한국비료, 영남화학, 동양나일론 등이 준공됐고, 한양화학과 대한유화 등 석유화학계열 공장들의 공사도 완료됐다. 당시 신입사원으로 한국비료 공장 준공에 참여했던 성건평 전 삼성정밀화학 사장은 "부산에서까지 그룹 관계사 임직원들이 동원돼 땅 파고 벽돌을 나르는 작업을 했다"며 "재원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도 울산에 자주 방문해 현장을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이 현장은 우리 경제를 이끌었던 '거인'들이 손을 맞잡은 역사적 현장이기도 했다. 성 사장은 "현대건설이 한국비료 건설에 참여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이 회장이 머리를 맞대는 모습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말했다.
◇70년~80년대, 울산공단 본격 확장기 = 1972년부터 77년까지는 석유화학 업종이 확장기에 접어들었을 뿐 아니라 자동차, 조선업 공장들이 본격 건설됐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조선소(현 현대중공업) 공장이 이때 생겨난 대표적인 공장이다. 1973년 현대조선소에 입사해 24년간 재직한 서남조씨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어수선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서씨는 "도크를 만들고 조선소의 모습을 갖춰가면서도 진수 요원을 확보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조선소 공장 건립과 배 제조가 동시에 이뤄졌다"며 "한쪽에서는 건물이 올라가고 한쪽에서는 배를 만들기 위해 무쇠조각을 자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고 말했다.
이제는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현대자동차도 시작은 미약했다. 1973년 입사해 총 15년간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한 박옥배씨는 "당시 현대차 울산공장에는 1공장(현 4공장 자리) 한 곳밖에 없었다"며 "근로자도 1500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현재 현대차공장은 495만 평방미터(㎡) 규모에 1공장부터 5공장까지 5개 생산 공정과 엔진변속기공장, 시트공장, 소재공장이 위치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고대 철기문화 중심지가 기계공업 중심지로 = 울산과 함께 동남벨트의 주축으로 불리는 창원국가산업단지는 울산 산업단지가 세워진 지 12년만인 1974년 생겨났다. 부산, 울산 등 주변도시와의 교통이 편리하고 공업용수, 생활용수 등을 구하기 쉬운 산업입지가 선정에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한반도의 고대 철기문화 중심지였던 가야ㆍ변한 등이 번성하기도 했던 창원이 기계공업 단지로 개발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산업단지 조성작업 진행 중에 발굴된 철기문화 유적지 '성산패총'은 현재 국가유형문화재 240호로 지정돼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창원공단은 70년대 석유파동으로 2번이나 시련을 겪는다. 공장이 설립되기도 전인 1973년 1차 석유파동을 맞았고, 초기인 1979년에 2차 파동을 맞아 상당수 업체들이 자금난과 수주물량 감소, 판매 부진이라는 '삼중고'를 겪었다. 당시 산업단지공단에 입사한 황석주 한국산업단지 동남권본부장은 "단지 조성이 한창이었던 당시 석유파동 사태로 공단에 들어온 대기업들마저 어려움을 호소했다"고 회상했다.
위기를 이겨낸 창원산업단지가 성장하면서 입주기업들도 커나갔다. 공장가동이 시작된 1975년 생산 15억원, 수출 60만 달러에서 지난 2011년에는 생산이 55조4000억 원, 수출이 233억7000만 달러로 껑충 뛰었다. 방효철 삼우금속공업 회장은 "공단에 입주했던 초기에 비해 현 매출은 50~60배, 종업원은 4배 증가했다"며 "초기에는 생산 인프라가 태부족이었는데, 현재는 완벽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초기 성장에는 대기업들을 위시한 방위산업체(방산체)가 큰 역할을 했다. 정부가 대기업들을 공단에 유치하면서 각각 자주포, 전차 등 방산 품목을 하나씩 쥐어준 것. 덕분에 현재 창원은 공단 내 '창원단지 방산 포럼(CoDIF)' 등 방산 생태계가 갖춰져 있는 방산의 메카 중 하나다. 방 회장은 "정부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렸다"며 "이제는 방산, 조선, 항공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산업단지"라고 평가했다.
◇산업발전 이끄는 '두개의 탑' = 울산과 창원 시내에는 각각 '공업의 탑'이 있다. 1967년과 1979년에 각각 만들어진 이 두 탑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하단부에 새긴 비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4000년 빈곤의 역사를…'로 시작되는 울산 공업탑 비문은 "제2차 산업의 우렁찬 건설의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 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 가는 그날엔 국가민족의 희망의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라며 산업 발전을 위해 힘써줄 것을 당부하고 있으며, 창원공단 비문에는 "우리 민족사에 찬란한 정밀공업의 금자탑을 세우자"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이미 두 산업공단이 세계적인 수출기지로 성장한 지금, 다시 한 번 공업탑에 새겨진 초창기의 의지와 희망을 재평가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해야 한다는 현지 기업인들의 충고도 이어진다.
황석주 동남권본부장은 "기업들의 자발적인 원가절감, 기술혁신 노력을 자극하기 위해 정부가 규제완화와 손톱 밑 가시 뽑기 등 지원에 힘써야 한다"며 "당시에는 정부 주도로 산업공단의 성장이 이뤄졌지만, 이제는 기업가들이 스스로 혁신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산업단지에 대한 국민적 인식 변화 유도를 위해 시범단지 확산도 요구했다. 그는 "구조고도화 사업이 공해, 유해물질, 낙후된 시설 등으로 기억되는 산업단지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가고 있다"며 "초기 공단 중 하나인 창원국가산업단지 역시 구조고도화 사업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leez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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