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2010년 6월 16일 새벽 3시 30분. 남아공에서 열리고 있는 월드컵축구 북한-브라질 경기 개막 당시를 잊지 못 한다. 그는 북한 국가가 울려퍼지자 체면 불구하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눈물은 세계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남아공 월드컵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기록돼 있다. 더불어 일본속의 한국인이라는 그의 남다른 인생도 눈물만큼이나 진하게 전해졌다.
그의 국적은 한국이다. 그러나 월드컵에는 북한선수로 뛰었다. 그는 늘상 일본에게 지는 북한팀이 서러워 인공기를 달았다고 했다. 또한 박지성과 한 팀에 돼서 경기하는 것이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남북단일팀, 그가 꿈꿨던 통일축구는 아직 미완이다.
그를 기억하기 앞서 '리 다다나리'라는 재일교포 축구선수가 떠오른다. 2011년초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극적인 결승골로 올려 일본의 영웅이 됐다. 재일교포 4세인 그는 우리가 버린 선수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이래 그의 꿈은 태극마크를 다는 것이었다. 2004년 각고의 노력끝에 한국 18세 이하 대표로 선발됐다. 그는 희망에 부풀어 현해탄을 건넜다.
끝내 그는 꿈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인보다 더 차별하는 동포들에 대한 기억과 설움, 상처만 안은 채. 그는 곧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6년 귀화 신청해 2007년 2월 일본인이 됐다. 그러자 이번엔 조국에 등을 돌렸다며 배신자라고 그를 비난했다. 마침내 일본인인 리 다다노리는 극적인 결승골을 터트리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지금 인터넷에 '이충성'이라고 치면 그에 관한 욕설로 도배돼 있다.
이게 우리의 한 자회상이다. 어디 그뿐인가 ? 희대의 파이터 추성훈도 한국선수로 뛰고 싶어 왔다고 되돌아간 사례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식민과 분단의 연좌제다. 연좌제는 그렇게 더욱 교묘히 다른 얼굴로 변신해 덮씌워졌을 뿐이다.
'죄의 연대책임', 연좌제는 사돈의 팔촌까지 죄를 묻는 제도다. 왕조시대 반란과 대역죄, 왕족ㆍ귀족에 대한 도전행위가 이에 해당된다. 연좌제에 걸리면 근친은 물론 본인의 친가, 외가, 배우자의 가계, 본인의 외가, 부친의 외가, 배우자의 집안 등 물론 삼족이 멸했다. 연좌제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됐다. 그러나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지난 80년이다.
하지만 단지 기록일 뿐이다. 식민ㆍ분단시대의 연좌제는 아직도 펄펄 살아 있다. 이충성은 일본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의 피를 물려받은게 이충성의 죄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죄값을 받으려고 혈안이다.
박지성과 함께 뛰고 싶다던 남북단일팀의 꿈은 정대세에게 있어 가히 형벌일 수 있다. 꿈을 꾸면 꿀수록 형벌의 무게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불행한 역사의 희생양에게 지워진 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에게 식민지 경험과 분단 현실이 없었다면 지금같은 이충성, 정대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헌데 우리가 지금 수많은 이충성과 정대세에게 형벌을 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대세는 J리그, 독일 분데스리가까지 먼 길을 거쳐 마침내 이땅의 축구판에 들어왔다. 부디 여기서는 상처도 설움도 받지 말고 마음껏 공을 차기를 바란다. 결코 상처가 아물 수 없어도, 친일파의 후손은 여전히 떵떵거리는 역사가 청산되지 않았어도 다시는 식민과 분단의 연좌제로 울지 마라.
"다음 경기에서도 몇 골 더 확 차 넣어라. 그리고 가증스런 역사에 한방 세게 날려라"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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