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대 미국의 초상화는 어린 아이들마저 기품, 위엄, 신중함 등의 내면적 특성을 담아낸다. 이는 북아메리카 초기 개척자들의 가치관이다. 여기서 여인들은 윤기나는 공단으로 온 몸을 두르고 점잖게 앉아 우아한 기품을 뽐낸다. 평면적인 화면속의 인물들은 모두 부유하고 안정감이 있다. 이들은 개인의 정체성보다는 사회적 계급, 가문의 긍지 등 문화적 권위를 구축하는데 열중한다. 당시의 초상화에는 식민지에 안착한 이주민들의 자부심이 넘친다.
1800년대 이후 북아메리카의 새로운 지배자들은 서부로 이동하면서 아직 식민지화되지 않은 자연에 매료된 것은 물론 새로운 풍경에 사로잡힌다. (메인 해안의 범선) 이들은 계곡, 산길을 뚫고 철도와 전선을 따라 새로운 평원을 향해 질주해 간다.(서스쿼해나강과 유나딜라강이 만나는 시드니평원) 공업화된 동부사회에서 밀려난 일부 하층민들은 '엘도라도'를 꿈꾸며 서부 캘리포니아로 몰려간다. 월리엄 스미스 주윗은 1850년 작 '약속의 땅-그레이슨 가족'을 통해 가족 초상화에 험난한 여행을 그려넣어 인생 역경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미국 미술 300년'전은 기획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역사의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서부 개척 시기 인디언 원주민사회에 가한 끔찍함은 어디에도 찾기 어렵다. 당시의 미술가들은 윤리적 부담이 덜한 방식으로 원주민 문화를 재구성하거나 미화시켜 추방의 흔적을 제거한다. (베짜는 사람) 일종의 문화적 공정이다. 때로 인디언문화를 차용하거나 인디언 전사를 신화속 영웅으로 그려 넣는다. 일부 백인들의 폭력성을 고발한 그림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흑인 노예들에 대한 표현도 이와 비슷하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북아메리카의 복잡 다단한 과거의 반영물이 아니라 미국 일부 계층이 자신들을 어떻게 표현했는 지를 살필 수 있는 기회다. 또한 미국인의 정서가 북아메리카라는 환경속에서 원주민들과 구별되는 문화적 유산, 사상감정의 전통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20세기 초∼제 2차 세계대전 사이의 미국 미술은 인물과 사회적 풍경에 대한 재해석이 다양하게 시도됐으며 토마스 하트 벤튼의 '노예들'에서는 잔혹한 노예 소유주의 전형적인 모습을 통해 강렬한 사회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유럽보다 더 세계주의적인 태도도 엿보인다. (윌라드 메트캐프 '하바나 항구', 에드윈 로드윅스 '마투라 강변 계단을 떠나라') 2차 세계 대전 이후엔 개인적이고 다문화적인 성격의 추상표현주의가 주류를 이룬다. 일부 추상을 넘어선 초현실주의적 자동기술기법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대중매체, 사진, 광고 등에 미술이 크게 후퇴한다. 엔디 워홀이 실크스키린 기법으로 구성한 '재키' 연작 등 공공의 불행과 상실감을 보여준 작품만이 대중에게 각인된 정도다.
미국의 현대 미술은 급진적 화면 구성, 자유로운 회화, 극적인 색채 등으로 추상 표현주의에서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으로 분화한다. 그러나 300여년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미국 미술은 가장 이상적인 미국주의에 집중함으로써 다양한 사상 감정, 흑인 혹은 인디언들의 정신적 가치, 문화적 융화에 매우 인색함을 드러낸다. 전반적으로 미국 미술은 잭 케루악 '길위에서(1957년)'가 보여주는 미국적 세계관, 풍요로운 물질 문명을 이뤄온 북아메리카 이주민들의 역동적 정서를 표현하는데 미학적 전통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해가 저버린 미국의 어느 날
낡고 망가진 강둑에 앉아 뉴저지 위로
펼쳐진 넓디 넓은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육지가 갑자기 믿기지 않을만큼 크게 부풀어
태평양 연안까지 이어지고
모든 꿈이 펼쳐지고
모든 것을 꿈꾸는 것을 느꼈다."
한편 이번 전시회는 전시 홈페이지(http://wwww.artcrossamerica)에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전시기간 동안 관련 특별 강좌와 다양한 체험학습, 문화행사도 펼쳐진다. (02) 1661-2440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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