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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명문가①250년 금융왕국 로스차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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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준 금결정권 200년 주무른 유대인 은행家

글로벌명문가①250년 금융왕국 로스차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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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금융왕국 로스차일드 가계도 크게보기

[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영국 언론들은 지난 해 내내 상장사 부미의 경영권 다툼을 대서특필했다. 리보(런던은행간금리) 조작파문 사건으로 4억5300만 달러의 벌금을 물기로 한 바클레이스은행 만큼이나 큰 비중을 두고 다룬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인도네시아 석탄사업에 투자하는 부미를 영국 언론들이 관심을 쏟은 것은 단순히 경영권 분쟁 때문은 아니다. 부미를 설립하고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주인공이 전세계를 호령했던 금융제국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 가문 상징물

로스차일드 가문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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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청년재벌 너새니얼 로스차일드(41)는 경영권 분쟁에 패해 이사회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그는 '인수합병(M&A)분야 전문 식견을 제공한다'거나 '로스차일드가문은 조용히 완벽하게 처리한다'는 금융계의 불문율을 깨고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는 오명을 둘러썼다. 그러나 부미 경영권 분쟁은 바클레이스와 같은 거대 은행의 등장으로 완전히 멸족한 줄 알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인의 관심에서 멀여졌지만 여전히 전문영역인 투자자문업과 투자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훈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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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호령한 금융왕조=로스차일드가문은 세계화 바람을 타고 자산규모 수천억 달러의 은행들이 등장하기 전인 19세기와 20세기 초 세계 금융권을 지배한 가문이었다.

1744년에 태어난 유태인 마이어 암셀 바우어(훗날 로스차일드로 성을 바꿈)는 대금업과 금화 거래로 사업을 시작해 왕가와 유착해 왕실 재정관리를 맡아 1800년 무렵에는 유럽 최대의 거부가 됐다. 그의 셋째 아들 네이선은 1811년에 런던에 NM로스차일드부자은행을 설립해 영국 금융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로스차일드가문은 영국의 유서 깊은 금융가문 베어링스와 독일의 오펜하이머가문 등 유럽의 금융가문을 차례로 꺾고 19세기에 전세계 금융업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1875년 영국 디즈레일리 정부에 400만 파운드를 융자해 영국이 수에즈운하 지분을 사들이는 일등 공신이 됐고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 외무 장관인 아서 밸푸어가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한 이후 이스라엘 건국에도 깊숙이 간여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으로부터 황금가격 결정권을 획득해 2004년까지 국제 황금가격 결정권을 행사했다. 또 미국 남북전쟁 민영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남북전쟁에 자금을 댄데 이어 1910년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법 제정회의를 주도하고 연방준비은행을 실질 관할하는 뉴욕연방준비은행의 주주로 참여했다.

그리고 100년 동안 살아남아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폐전쟁의 저자 쑹홍빙은 1850년을 전후해 로스차일드 가문이 총 60억 달러,오늘날 돈으로 50조 달러 이상을 축적한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의 웹사이트 실레브러티 넷워쓰는 4000억 달러로로 추정했다. 로스차일드의 후손인 제이콥 로스차일드 RIT캐피털매니지먼트 회장은 영국의 데일리메일이 매년 발표하는 부자순위에서 자산 4억6500만 파운드로 192위에 올랐지만 실레브러티는 그의 재산을 500억 달러로 추정하기도 했다.

세계 3대 가문 비교

세계 3대 가문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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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처럼 살아남다=철옹성 같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와 명성도 역사와 함께 부침을 거듭했다.

 나폴레옹 1세 몰락이후 부르봉 왕조와 오를레앙 왕조를 지원하다 1848년 2월 혁명후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로스차일드의 넷째 아들이 세운 나폴리 은행이 1863년 시칠리아 황실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고, 장남이 세운 프랑크푸르트 은행도 장남이 없어 1901년 문을 닫았다. 빈 은행은 1938년 나치에 몰수됐다. 제1ㆍ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많은 재산을 잃었다. 다섯째 아들제임스가 세운 프랑스 은행은 1981년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국유화됐다.

 또 로스차일드 가문을 상징하는 버킹엄셔의 대저택 '워즈던 매너'를 비롯한 유럽 각지의 대저택이 상속세 부담을 못이겨 영국문화재단과 파리대학 등에 기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굴하지 않았다. 제임스의 후손인 기 에두아르 알퐁스 로스차일드 남작은 미국으로 건너가 오를레앙 은행을 설립하고 1942년 설립한 뉴코트 증권을 확장했다.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 은행은 합병해 로스차일드그룹으로 변신했다.로스차일드그룹은 M&A자문,개인자산관리,사모펀드 투자 등에 집중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인수합병 자문을 하고 있다.

◆로스차일드가문의 난세 처세술=로스차일드 가문이 250년간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여러 가지다.

 우선,이들은 한우물만 팠다. 가문의 장남들은 런던의 NM로스차일드은행에서 금융업을 배웠다.국채의 인수와 발행, 판매,외환 등 머천트 은행업에만 주력했다.
 둘째는 정보력이다.로스차일드는 다섯 아들을 유럽 각지에 보내 은행을 설립하게 하고 그 정보네트워크를 활용했다.그 단적인 예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것을 먼저 알고 영국 국채를 공매도해 돈방석에 앉은 것이다.수에즈 운하 건설로 재정난을 겪던 수에즈 운하 지분 40%를 매각하려 한다는 정보도 영국 정부보다 먼저 입수했다. 로스차일드 자신은 유태인의 랍비교육을 받고 독일어에다 유태인 언어를 배합해 만든 이디시어로 문서를 작성해 비밀을 지켰다.

셋째 가문의 결속력이다. 로스차일드는 1812년 세상을 떠나기 전 다섯가지 유언을 남겼다. 가문은행의 요직은 반드시 가문 내부에서 맡고, 재산외부 유출을 방지하며,재산상황을 외부로 공개하지 않으며, 재산 상속시 변호사 개입을 금지하고 집안 장자가 가문의 우두머리가 돼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 휘호에 새겨진 '협조'(concordia)와 '완전'(integritas),'근면'(industria)이라는 세 라틴어가 그의 유언을 압축하고 있다.

일본의 요코야마 산시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슈퍼리치'로서 성공을 거둔 이유로 이같은 가족경영과 정보력중시, 고난극복력을 꼽았다.산시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슈퍼리치로서 차별화된 성공을 거둔 것은 끊임없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업에 치중하면서 철도와 다이아몬드, 석유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오펜하이머가 드비어스를 창업할 때 자금을 대고 바쿠유전 개발 자금을 지원했으며 프랑스철도 산업에 투자했고 라피트와 무통 등 세계 최고급 와인산업에 진출하는 혜안을 보였다.




박희준 기자 jack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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