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문은 용산참사의 진실규명이라는 사회운동과 독립다큐멘터리의 상영운동이 만난 사례"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다 죽어."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유독가스와 화염이 뒤엉킨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한 철거민이 특공대원을 향해 외친다.
그날 그곳에 있지 않았던 우리들은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짐작하긴 쉽지 않다. 다만 그날 망루에 올랐던 특공대원의 검찰진술을 통해 추측해볼 뿐이다. "진압 당시엔 적개심에 '올라오면 다 죽여버리겠다'로 들렸다.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보니 '위험하니 피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꺼이 짬을 내 용산참사의 증인이 되길 자처하고 있다. 실제 '두개의 문'은 독립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관객 1만명을 돌파했다. 최근에도 정치인들이나 연예인, 팬클럽 등 각계각층의 관객들이 단체관람을 앞다퉈 실시하고 있을 정도다.
용산참사의 재판 과정을 모니터하다 다큐멘터리로 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홍지유 감독은 "용산참사의 진실규명이라는 사회운동과 독립다큐멘터리 상영 운동이 만난 사례"라고 '두개의 문' 신드롬을 설명한다.
감독의 의도대로 '두개의 문'은 철거민뿐만 아니라 당시 현장에 투입된 경찰특공대 역시 사건의 피해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때의 상황을 힘겹게 말하는 경찰특공대의 육성과 '생지옥'이나 '아비규환'으로 사건 현장을 묘사한 경찰의 자필 기록은 어느 언론에서도 보여주지 못했던 일이다. 홍 감독은 영화를 통해 왜 '진압'작전이 아닌 '구조'작전이 되지 못했을까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진다.
"영화에 담지 못했지만 증인석에 섰던 경찰특공대 한 분의 육성은 굉장히 떨리고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망루에 올라가기 전, 고인이 된 경찰특공대원과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눴던 한 경찰은 실제로 많이 힘들고, 잠을 자거나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고 진술했어요. 그날 사건이 위태롭게 돌아가자 혼자 철거민들 사이를 오가며 대화를 시도했던 한 형사도 증인석에서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협상 없이 진압작전이 그대로 진행된 것에 대한 자괴감과 허망함을 말씀해주셨죠. 이분들이 그런 분노, 갈등, 상처 이런 트라우마를 혼자서 감당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감한 이슈를 다룬 만큼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소위 '안티'도 생겼다. 영화 평점을 매기는 사이트에 일부 네티즌들이 '1점'을 투척하는 일이 실시간으로 벌어졌다. '선동영화'라는 비난이 게시판을 도배하기도 했다.
"왜 그 분들이 그토록 용산참사에 대한 혐오를 즉각적으로 드러낼까 생각해봤어요. 아마 법을 어기는 것이 곧 혐오의 대상이 되도록 학습된 탓이 크지 않을까요. 일단 누군가의 파업에 대해서 불법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리면 왜 그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게 됐는지는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용산에서도 철거민들이 농성을 시작한다고 하자 일각에서는 '출근길이 막힐 것이다' '교통이 마비될 것이다' 하는 짜증 섞인 반응부터 보였잖아요."
홍 감독은 용산 현장에서 찍은 카메라 기록, 재판 자료, 경찰 채집 영상, 경찰특공대원들의 진술 등 막대한 분량의 자료와 씨름했다. 처음에는 불타는 남일당의 영상을 오래 보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관객들이 나중에 이 영화를 만날 생각에 시간이 지나면서 더 차분하고 냉정해질 수 있었다. 또 영화가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각계각층의 시민 800명으로 구성된 배급위원들의 도움도 힘을 보탰다.
그렇다면 '두개의 문'을 보고 용산참사의 증인이 된 관객들은 용산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더 이상 용산참사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 것보다는 함께 살고 있는 사회구성원으로서 누군가의 아픔을 포용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치유의 시작인데, 모두가 함께 치유되기 위해서는 책임져야 할 사람의 진심어린 사과가 있어야겠죠. 또 '용산을 잊지 말자'가 아니라 '용산을 정확히 기억하자'하는 마음이면 더 좋겠습니다. 결국 기억하는 사람이 이기거든요."
조민서 기자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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