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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떠나는 전라도 여행[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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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시인의 '화엄사 기행<4>

비가 내렸다

300년 된 홍매화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한 차례 비가 내렸다. 화엄사의 홍매화는 그 꽃 색이 진해서 일명 흑매화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 한 그루밖에 없다고 한다. 꽃이 피어 있을 때 왔었더라면 나는 분명 곱게 늙은 공양주보살을 떠올렸을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향기를 발할 수 있는 것이 꽃이다

존재 그 자체로 향기를 발할 수 있는 것이 꽃이다.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으나 향기로 그 자신을 말하며, 향기로 그 자신을 드러낸다. ‘화엄華嚴’의 뜻은 ‘여러 가지 꽃’이다. 화엄을 몸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꽃이 아닐까. 언젠가 화개에서 매화차를 한 통 사온 적이 있었는데, 차를 마셔보니 꽃잎 하나만 찻잔에 띄웠을 뿐인데도 그 향이 입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부처의 가르침이란 것도 그렇게 입속에, 마음에, 영혼에 오래 은은한 향을 남기는 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홍매화나무 아래서 비를 맞았는데 더 오래 비에 젖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비를 맞기 보다는 비를 피하는 데만 애를 썼던 것 같다. 비에 흠뻑 젖은 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렸던 적도 없었다. 비가 내리는 매화나무 아래에 가만히 서 있으면 봄철에 지고 난 매화 향이 스며들 듯. 가끔은 저녁 빗줄기에 갇혀 꽃향기 그윽한 그리움에 젖어 볼 일이었다.

빗속에서 감상에 젖은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대웅전 팔작지붕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서 울고 있었다. 마치 일부러 연출한 상황처럼 정말 까마귀가 지붕 꼭대기에 앉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마귀는 효조孝鳥여서, 제 부모를 위해 먹이를 물어 나른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에선 까마귀를 신의 사자로 여겼다. 하지만 대웅전 지붕 위에 내려앉은 까마귀는 머리가 헝클어진 한 사내의 자화상쯤으로 여겨졌다. 까마귀는 묵직한 저음으로 이따금씩 말을 걸어왔다. 그의 말은 너무 어두컴컴해서 나는 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빗속에서 비에 젖는 것들의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비가 몸속에까지 내리고 있었다.

소를 찾아서


불가에선 도를 깨우치기 위한 과정을 소를 찾는 과정으로 표현한다. 그 그림을 심우도 尋牛圖 혹은 십우도十牛圖라 하는데, 불심 혹은 자아를 상징하는 소를 찾고 마침내 찾은 소를 놓음으로써 혹은 염두에 두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를 완성한다는 내용이다.
젊어서 혁명가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 세상을 구해야겠다는 불 같은 열정이야말로 인간이 피워낼 수 있는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나 가끔 생각한다. 그것이 자기만족을 위한 확신은 아니었는지 풀밭에 소 한 마리를 잡아서 매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거기에 아집과 탐욕에 사로잡힌 불쌍한 늙은 자신이 묶여 있는 건 아닌지. 소를 잡았는데, 그 소를 다시 버려야 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세상의 모든 혁명가들이여, 다시 고삐를 찬찬히 들여다 보라. 무엇을 손에 들었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은 거기 가득 담긴 별들을 꿈꾸며 우리에 누워 잠든다

구시통의 표준어는 구유다. 구유는 가축의 먹이를 담아주는 큰 그릇이다. 예로부터 사찰에서는 구시 또는 구시통이라 불리었다. 화엄사에서 구시통을 보았다. 1천여 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여 대중생활을 하는 사찰에서는 쌀을 씻는데 사용하거나 법회 등 큰 행사 때 밥을 비벼서 내놓는데 사용한 것으로 전해져온단다. 처음 화엄사 어느 건물 모퉁이를 돌다가 우연히 구시통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무슨 쪽배인 줄 알았다. 그렇게 큰 밥통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천여 개의 밥숟가락을 들고 천여 명의 사람들이 밥을 떠 먹는다고 생각하면 재미있다. 인간이 가축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어두워지는 하늘을 조용히 둘러보면 보인다. 하늘은 하나의 커다란 소 여물통, 인간은 거기 가득 담긴 별들을 꿈꾸며 우리에 누워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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