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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융사]1907년 금융위기와 JP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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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융사]1907년 금융위기와 JP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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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시작됐지만, 미국은 해밀턴이 제안한 은행을 감독하고 최후의 대부자 역할을 감당할 중앙은행이 없었다. 그래도 미국경제는 매년 5% 성장하면서 은행의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07년 미국에는 인구 4000명당 1개, 2만2000개의 은행이 있었다. 그리고 대도시에는 금융위기의 주범이 된 신탁회사가 있었다.


1890년대 초 등장한 신탁회사는 채권과 주식투자를 하다가, 예금도 취급했다. 신탁회사는 말하자면 유사은행이 된 것이다. 일반 은행과 비교했을 때 그들은 더 위험한 자산에 투자했지만,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은행은 자산의 25%를 현금으로 보유해야 하지만 신탁회사는 최소 5% 의무만 있었다. 은행보다 더 높은 이자를 지불하면서, 1907년까지 10년 동안 거의 250% 성장해 거의 국립 은행만큼 커졌다.

규제 없는 신탁회사는 1907년 금융위기에 중심에 있었다. 주범 중의 주범이 니커보커 신탁이다. 구리광산업자인 아우구스투스 에인세와 얼음제조업자인 찰스 모스가 동업해 만든 신탁회사다. 니커보커 신탁의 예금은 1897년 1000만달러에서 1907년 6000만달러 이상으로 급증해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신탁이 됐다.


다만 니커보커 신탁은 구리회사인 유나이티드 코퍼 주식을 대량 매집했다가 주가가 폭락하는 바람에 큰 손실을 경험했다. 구리회사의 주식을 구매하기 위해 그들의 은행에서 막대한 금액을 빌리고 횡령했다. 그런데 경제는 1907년에 약간 둔화되기 시작해 금속을 포함한 원자재 가격이 하락했다. 덩달아 구리회사의 주가도 하락했다. 주식 가격이 하락하면서 하인즈와 모스는 막대한 레버리지로 인해 큰 손실을 보게 됐다.


이에 투자자들이 자금회수에 나서면서 뱅크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은행의 자금 상황에 대해 소문이 퍼지자, 예금자들은 현금을 요구하며 거리에 줄을 섰다. 다니커보거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800만 달러를 지불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일부 요구 사항을 거부해야 했고 다른 신탁으로 불이 옮겨졌다. 신탁회사인 아메리카, 링컨 트러스 등도 뱅크런이 시작됐다. 일부 뉴요커들은 한 신탁에서 다른 신탁으로 현금을 옮겼다. 금융 시스템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미국인들은 집에 현금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주가가 폭락하자 뉴욕증권거래소는 유나이티드 코퍼의 거래를 중지시켰다. 유나이티드 코퍼에 모두 투자한 니커보커신탁에는 투자자들이 몰려들어 투자자금을 회수했고, 신탁회사는 이틀 만에 파산 위기에 몰린다.


공황이 확산되고 금리가 125%까지 치솟자, 1907년 10월 JP 모건이 구제자로 등장한다. 모건은 우선 현금을 마련했다. 현금 2500만달러의 구제 자금이 합의될 때까지 전체 뉴욕 은행 커뮤니티를 자신의 도서관에 가뒀다. 붕괴는 막았지만 그 정도 현금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견고한 경제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자금 부족을 초래했고, 경제도 침체됐다. 모건은 '한계를 정해놓고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신탁회사 사장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모건 본사로 몰려들었지만, 실사를 통해 살릴 수 있는 기업과 문을 닫아야 할 기업을 구분했다. 그 기준에 따라 현금결제를 요구하는 어음에 지급보증을 했다. 그가 구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구제자금을 모을 수 있는 재력만이 아니라 그가 가진 권위 혹은 그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사업가이기 때문에 공짜는 없었다. 모건이 지배하고 있는 US스틸은 일종의 전리품으로 테네시 석탄·철강·철도 회사(TC&I)를 인수했다.


모건이 주도한 거시적인 구제안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특정 경제 상황에 대응하는 해결책이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부족한 법정화폐의 대안이 곧 등장했다. 달러 지폐의 대체품으로 은행의 수표와 소액 차용증이 현장에서 법정 화폐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칙적으로 그것은 불법이지만 민간 부문 긴급 현금의 총 가치는 모건 구제 금융보다 훨씬 큰 약 5억달러였다. 일종의 편법이지만, 이를 통해 1909년까지 미국 경제는 다시 성장했다.


이후 드디어 중앙은행이 만들어졌다. 최초 구제안은 현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공식 긴급자금 5억달러를 공급하는 것에 집중됐다. 이후 미국의 화폐가 작동하는 방식을 논의할 위원회(국가 통화 위원회) 설립이 논의됐다. 4년 동안 시스템을 재구성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해 전 세계의 증거를 조사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적절한 대출 기관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결과 1913년 12월에 미국의 세 번째 중앙은행을 설립에 필요한 연방준비법을 제정했다. 해밀턴은 결국 뒤늦게 길을 찾은 것이다.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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