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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왜구의 나라 일본, 고려군을 '해적'으로 오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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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해적을 고려군으로 오해...고려는 오히려 일본인 포로 송환
13세기 이후 일본 정정 불안... 해적 약탈지에서 왜구 본거지로 변화

(사진= 영화 '명량' 장면 캡쳐)

(사진= 영화 '명량' 장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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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우리나라 삼국시대 이후 계속 전개돼 온 한일관계사에서 양국간 가장 교역이 없던 시기는 단연 고려 전기다. 고려왕조는 후삼국 통일 직후인 937년부터 줄기차게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맺고자 했으나 일본 측의 오해로 인해 장기간 양국간 국교가 트이질 못했다. 일본은 고려왕조를 '해적의 나라'로 오해했으며, 양자간 오해는 100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여진족의 일본 침공 이후 풀리게 됐다.


원래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백제를 중심으로 고구려와 신라가 앞다퉈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663년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일본군 3만명이 파병됐던 백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이 승전한 이후부터 통일신라와 일본의 공식적인 관계는 단절됐다. 이후 후삼국시대가 정리된 10세기부터 고려왕조는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자 노력했으나 일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국교를 거부했다.

11세기 연해주 일대 여진족들의 해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고려 동부해안과 일본까지 여진해적이 들끓었다. 1018년 울릉도를 점령한 여진족 해적들은 이듬해 대마도를 거쳐 규슈를 공격(빨간색 화살표 표시)해 큰 피해를 입힌다.(지도= 두산백과)

11세기 연해주 일대 여진족들의 해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고려 동부해안과 일본까지 여진해적이 들끓었다. 1018년 울릉도를 점령한 여진족 해적들은 이듬해 대마도를 거쳐 규슈를 공격(빨간색 화살표 표시)해 큰 피해를 입힌다.(지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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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은 신라, 중국, 여진족 등 동북아 각지의 해적세력들의 주요 약탈지였다. 한반도와 가까운 대마도를 비롯해 규슈지역은 해적이 끊이질 않았다. 일본인들은 해적선이 대부분 한반도 쪽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고려왕조 역시 해적의 나라라 여겼으며, 이후 11세기 여진족 해적들의 대대적인 침공 역시 처음에는 고려왕조의 침략행위라 오해했다.


1019년, 여진족들은 50척의 해적선과 3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쓰시마부터 하카타만 등 일본 서남해안 일대를 휩쓸며 대규모 약탈을 자행했다. 서남해안 일대에서만 360여명이 학살당하고 1300여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 해적선단이 분탕질 후 한반도 해안으로 건너가면서 일본인들은 이들을 고려해적이라고 착각하게 됐으며 고려에 대해 더욱 경계심을 품게 됐다.


12세기 태안 앞바다에 침몰된 고려청자 운송선을 지난 2009년 복원한 '온누비호'의 모습. 고려왕조는 활발한 해상교역을 실시했고 수군도 강하며 조선술도 뛰어났다. 일본은 10세기 이후 오랜기간 동안 여진족 해적들을 고려에서 보낸 것으로 오해했다.(사진=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12세기 태안 앞바다에 침몰된 고려청자 운송선을 지난 2009년 복원한 '온누비호'의 모습. 고려왕조는 활발한 해상교역을 실시했고 수군도 강하며 조선술도 뛰어났다. 일본은 10세기 이후 오랜기간 동안 여진족 해적들을 고려에서 보낸 것으로 오해했다.(사진=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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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오해했던 이유는 앞서 신라해적들의 전례 뿐만 아니라 당시 여진족 중 상당수 부족이 고려왕조에 조공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019년은 고려와 거란족 요나라 간 일대 대전인 귀주대첩이 벌어진 해로 여진족 역시 부족별로 고려측, 혹은 거란측과 연합하거나 조공하는 상황이었다. 이들 여진족들은 11세기 이후 고려와 요나라가 계속 대전을 벌이면서 국경지역을 폐쇄하고 만주 및 함경도 일대의 교역이 어려워지면서 바다로 진출, 한반도 및 일본 해안 일대를 약탈하는 해적이 된 상태였다.

이들 여진족 해적들은 고려사 기록에 1005년부터 등장하기 시작, 통천, 고성, 양양 등 고려의 동해안 북부일대를 비롯해 남으로는 경주일대를 약탈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고려의 해군력에 소탕되기 시작하자 1018년 울릉도 일대를 점령, 교두보로 마련한 뒤 이듬해 일본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외적 침입을 별도로 겪어본 적이 없던 일본 입장에서는 여진족이라 생각지 못하고 고려의 침공으로 착각했던 것.


그러나 곧 이 해적단이 고려군이 아님이 바로 밝혀진다. 여진족 해적선단은 고려 해안에서 똑같이 해적질을 벌이다가 출동한 고려 해군에 격퇴당했으며, 그들에게 포로로 잡혔던 일본인 300여명이 고려군에 의해 구출됐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는 고려군이 해적선 안에 일본인 남녀 포로를 찾아내 김해지역에 안치, 옷과 식량을 지원했으며 모두 일본으로 송환했다. 이후 일본 조정은 그제서야 고려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감사의 국서와 함께 금을 보냈다고 알려져있다.


13세기 이후 일본의 정정 불안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일본 해적, 왜구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사진=우리역사넷)

13세기 이후 일본의 정정 불안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일본 해적, 왜구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사진=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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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 입장에서는 당시 거란이란 거대한 적과 맞서고 있는 상황이고, 여진족 해적들의 침입도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가 필요했기 때문에 일본인 포로에 대한 인도적 처우를 실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오해가 풀린 양국은 과거에 비해 관계가 가까워지게 되며 이 관계는 고려왕조가 대몽항쟁 이후 원나라와 함께 일본원정을 실시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후 13~16세기 일본 정국이 대혼란에 휩싸이면서 역으로 일본에서 생겨난 해적이 동아시아 해안의 골치거리가 되어 상황이 역전된다. 그 해적들이 바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동북아 3국 역사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게 되는, 향후 500년간 한반도에서 일본을 지칭할 때 쓰던 단어인 '왜구'였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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