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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욕망, 혹은 추억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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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만년 달력이 하나 있다. 작은 액자로 된 이 달력은 이십년도 더 된 것이다. 달 따로, 날짜 따로 적힌 카드들을 조합하여 한 달씩 배치하는 식이다. 윤년이 따로 없어 4년마다 한 번씩 2월의 마지막 날은 하루를 반복해서 사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 외엔 특별히 불편한 점이 없다. 오히려 달이 바뀔 때마다 이리저리 카드를 맞춰 보며 짝 찾기 놀이를 하는 듯 잔재미도 없지 않다. 문제는 우리 집 달력이 이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방마다 있는 것은 물론 책상, 거실 탁자, 심지어 부엌에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새삼 든 생각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수년간 옷장 속에서 잠자고 있는 옷들이며 붙박이 장식마냥 책장에 갇혀 있는 책들, 오지도 않을 손님을 기다리며 찬장에 드러누운 그릇들, 이젠 쓸 일도 없는 가족용 물놀이 용품에, 발 모양이 변해 다시 신을 수조차 없는 하이힐까지…. 꼽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가까운 이들 가운데 유명을 달리하는 이들이 생기면서 새삼 매사를 정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더니, 비로소 주위 사람들의 지혜가 귀에 들어왔다.

한 후배는 "이제 옷을 하나 사면 반드시 하나는 버리기를 실천하고 있다"고 했다. 하나를 새로 마련한다는 것은 안 입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 직장생활을 했던 까닭에 옷의 잔고가 제법 됨에도 불구하고 아예 새 옷을 사지 않고 지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배는 블라우스를 사면 블라우스를 총정리하여 하나를 버리고, 새 스커트를 마련하면 반드시 기존의 스커트 하나를 버리는 식으로 옷장 안의 절대치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새 책을 사서 읽고 나면 즉시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수소문하여 책을 넘겨준다는 선배도 있었다. 눈이 침침해진 요즘도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사랑하는, 어쩔 수 없는 '활자 미디어 세대'들의 가장 큰 고민은 '차마 버릴 수 없는 장서들'이다. 기증을 받아주는 곳을 찾기도 힘든 데다 어쩌다 이런 곳을 발견하더라도 기증하려면 따로 관리비용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중고기증물품을 판매해 그 이익금을 사회로 환원하는 아름다운 가게 같은 곳에서도 3년이 넘은 도서는 '노 생큐'이니 막막할 수밖에. 그러니 책을 버린다는 것이 분서갱유와 다를 바 없는 활자세대들은 막연히 '마음 부담 없는 후대들이 정리해주길' 기대하면서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욕조에 들어앉아 책 읽기를 좋아했던 선배는 '종이가 물을 먹으면 부풀어 오르는 통에' 평생 즐겨온 습관까지 버려야 했지만 "쌓여가는 책들이 주는 압박감에서 해방됐다"며 웃었다.

한 지인은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값비싼 그릇들이 수십 년이 지나니 저절로 잔금이 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모셔 놓은 그릇들을 죄다 꺼내 쓰고 있다"고 말했다. '나 홀로 세대'에 접어든 이즈음에는 '집에서 식사 초대하기'와 같은 생활방식은 아예 자취를 감춰 '접대용 그릇'을 사용할 일도 없는 데다, 사기그릇도 사용하지 않으면 건조해져 균열이 생기니, '그릇 대물림'이란 허황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욕망으로, 혹은 추억의 이름으로 필요와 상관없이 지니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세밑이다. 한 해를 갈무리하며 지금의 삶의 방식과 결별하고 새로운 다짐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더 많이' '더 새로운'에 사로잡혀온 우리네 생활 방정식을 '최소한' '되풀이하는'과 같은 미니멀리즘의 공식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보이지 않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매몰되고, 유튜브 조회 수에 목을 매는, 허망한 디지털 세상의 네트워크까지도.

홍은희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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