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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무조건 주면 '막무가내 인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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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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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파피루스(Papyrus)는 종이(Paper)의 기원이 아니다. 그저 '종이'의 영어 어원일 뿐이다. 둘 다 기록하는 재료로서 쓰임새가 같지만, 파피루스의 발명이 종이보다 3세기쯤 앞서 있는데도 결과가 그렇다. 이는 한마디로 여유와 결핍의 관계 혹은 우위와 열등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집트의 라일강가에서만 유독 자라는 갈대를 사용해서 그 성질의 변화 없이 큰 노동력으로도 소량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 파피루스였지만, 반면에 식물의 섬유를 사용해 적은 노동력으로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종이였다. 당연히 노예 노동력의 여유에 빠져있던 이집트는 구태여 '종이'를 생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피루스 독점 생산이라는 우월적 지위 덕에,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에 70만 개의 두루마리(책)를 소장한 세계 최고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이를 부러워한 이웃나라 페라가몬(지금의 터키)의 앗탈로스 2세도 지식과 학문 중흥의 꿈을 갖고, 이집트산 갈대를 수입해 파피루스를 만들어 두루마리(책)를 발간해오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집트의 수출금지 조치를 통보받게 된다. 이 궁지를 헤쳐나가기 위해 만든 것이 양피지다. 어린 양의 껍질로 만든 양피지는 아무리 얇게 만들어도, 두루마리로 발간했을 때 크고 무거워서 관리와 이용에 어려움이 컸다. 이때 만들어낸 것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권취 형태의 한쪽을 묶어 옆으로 넘기는 책이었다.

이렇게 이집트는 세계사 속의, 종이 발명국 지위도 책 발명국 지위도 다 잃어 버렸다. 여유가 부른 침체와 퇴보였다. 반면에 결핍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었던 나라는 창의와 생성의 힘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지난 석 달 동안 나라 안에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부쩍 많이 나타났다. 그들은 여기저기에 많은 것을 주겠다고 했다. 수입이 적다싶은 근로자들부터, 그들을 고용하고 있는 영세업자들한테까지. 그리고 생계가 어렵다 여겨지는 노년층에게, 신성한 국방의무를 이행하는 나라의 군인들에게, 빚을 진 뒤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자들에게 등. 이 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려 속에서 애만 태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여기저기에 주고 주려는 이유를 알고 있다. 열등한 지위의 사람들에게 사람다운 삶을 주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까지 하는 것을 보면 쾌도난마식으로 느껴지면서 '무조건'으로 읽혀진다. 정녕 이러다보면 가까운 때에 '막무가내'로 읽혀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소수파이고 이미 해놓은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이안 부루마가 1945년 이후의 세계사를 살펴서 쓴 책, <0년>을 새겨 읽어보면, 역사적 격랑 끝의 출발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끝까지 절름거리면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벽한 이상 실현은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불합리성과 결핍을 앞서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 그와 함께 제대로 받을 사람에게 줘야, 결핍과 열등을 창의와 생성으로 바꿔, 비로소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무조건, 막무가내는 매우 위험하다. 이는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그렇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가리고 세상을 느끼는 가슴을 가리게 한다. 염치를 잃어버린 존재를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거기에 그 경계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불평과 불만 속에 몰아넣는다. 그리하여 끝내는 현재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몰락시키고, 세상을 허방 속으로 빠뜨릴 수 있다. 얼마든지 있다. 일본의 '프리터족'은 그런 조건이, 그런 환경이 낳은 '막무가내 인류'다.

이상문 소설가 전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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