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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탐구-진고개]명동 세종호텔 뒤 그곳의 비밀… 일제 땐 최고 쇼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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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각시 구경가자"?… 진흙탕길 가난한 선비 마을에서 최첨단 상가로 거듭 나


현재 남산 한옥마을 자리에는 을사조약 이후 일본 헌병대 사령부가 있었다. 남산 예장터를 허물고는 조선통감부 청사가 들어섰다. 일본은 천천히 남산 인근을 장악하고 유린했으며, 딸깍발이가 모여사는 진고개 역시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지정되며 예외없이 개발의 대상이 됐다. 사진 = 남산한옥마을

현재 남산 한옥마을 자리에는 을사조약 이후 일본 헌병대 사령부가 있었다. 남산 예장터를 허물고는 조선통감부 청사가 들어섰다. 일본은 천천히 남산 인근을 장악하고 유린했으며, 딸깍발이가 모여사는 진고개 역시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지정되며 예외없이 개발의 대상이 됐다. 사진 = 남산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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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그네들의 상점에 들어서면 사람의 간장까지 녹여 없앨 듯 친절하고 정다운 일본인 점원들의 태도에 다시 마음과 정신이 끌리고 말어 한 푼어치도 그리고 두 푼어치 우리 수중의 있는 많지 않은 ‘돈’은 그네들의 손으로 옮기고 마는 것이다."

- 정수일, ‘진고개’, 별건곤 1929년 9월호

눈깔사탕 한 줌 사며 어여쁜 왜(倭)각시 구경하러 몰려든 인파는 딸깍발이 모여 살던 조용한 동네 ‘진고개’를 한순간에 서울을 대표하는 번화가로 바꿔놓았고, 일제강점기에는 한 번 들어갔다 하면 뭐라도 하나 사서 나왔을 만큼 눈길을 사로잡고, 마음을 빼앗는 친절과 양품으로 조선인의 주머니를 열어젖혔다. 꼿꼿한 선비의 마을 남촌, 진고개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02년 당시의 진고개 풍경. 멀리 보이는 큰 양옥 건물이 명동성당이다.

1902년 당시의 진고개 풍경. 멀리 보이는 큰 양옥 건물이 명동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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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 오면 진흙이 산처럼 쌓이고

도성 안 북촌에는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세도가 양반이 모여 살고, 도성 밖 남산 아래 남촌에는 관직 진출이 요원한 생원, 진사와 하급관리, 무반들이 모여 살았다. 가난한 남산골 선비는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다녀 걸음걸음마다 ‘딸깍딸깍’ 소리가 나 ‘딸깍발이’라 불렸는데, 마른날 신을 짚신 살 돈이 없음이 첫째 이유요, 둘째로는 이 일대가 온통 진흙탕 길이라 그냥 다니기 어려웠던 까닭이 숨어 있었다.
1840년대 제작된 김정호의 수선전도 (首善全圖)는 '서울의 지도'란 뜻인데, 산과 산 줄기에 채색이 되어있고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어 당대 소장품으로 가치가 높은 지도였다. 사진 속 빨간 네모 부분이 이현(泥峴), 진고개를 표기한 부분이다. 사진 = 수선전도, 김정호, 1840년대, 101.2 x 66 cm

1840년대 제작된 김정호의 수선전도 (首善全圖)는 '서울의 지도'란 뜻인데, 산과 산 줄기에 채색이 되어있고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어 당대 소장품으로 가치가 높은 지도였다. 사진 속 빨간 네모 부분이 이현(泥峴), 진고개를 표기한 부분이다. 사진 = 수선전도, 김정호, 1840년대, 101.2 x 6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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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물길이 청계천과 만나는 곳

진고개는 지금 명동 세종호텔 뒤 일대를 이르는 말로 남산 잠두봉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창 내와 마른 내가 수표교에서 청계천과 합수되는 길목의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문제는 남산서 내려온 토사가 흐르기에 마른내는 말 그대로 물줄기가 약한 길이라 흙이 빠져나가지 못해 퍼진 탓에 이 근방은 진흙탕 길로 악명이 높았다. 비라도 오는 날엔 당장 통행이 어려웠을 정도.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이 근방의 지명이 진고개, 또는 이현(泥峴, 진흙고개)이 된 것이다.

1930년대 혼마치 초입의 풍경. 당시 지방 사람들의 소원은 혼마치를 구경하고, 제대로 된 물건을 사오는 것이었을 정도로 진고개는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일본인의 손에 변모했다.

1930년대 혼마치 초입의 풍경. 당시 지방 사람들의 소원은 혼마치를 구경하고, 제대로 된 물건을 사오는 것이었을 정도로 진고개는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일본인의 손에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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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에 질려 시작된 최초의 하수도 공사

경복궁을 가로막고 들어선 조선총독부 신청사 완공 이전 일본의 조선공사관과 통감부는 모두 남산에 자리를 잡았다. 1885년 곤도 대리공사는 조선 조정과의 협의 끝에 진고개 일대를 일본인 거류구역으로 정했고, 이후 진고개를 중심으로 서울에 들어온 일본 상인들이 상점을 열어 그 세를 확장해나갔다. 하지만 장사는 둘째 치고 비만 오면 통행이 어려울 만큼 쌓이는 토사로 손님은커녕 본인 거주조차 어려워지자 일본인들은 진고개를 피해 남대문이나 갓우물골(오눌날 중구 입정동)로 집을 옮기는 바람에 진고개 일대 상권은 이내 황량해졌다.

이에 일본 공사관은 거류민들을 대상으로 공사자금을 거두고 자금을 출연해 도로공사에 착수했다. 1895년에 시작된 공사는 이후 1904년, 1906넌 도로를 더 확장하고 개수하는 보수공사를 거듭해 흙바닥 아래 2.5m의 잔토를 걷어내 언덕의 높이를 낮추고 길을 확장한 뒤 1.5m 높이 수멍을 묻고 암거(暗渠, 속도랑)를 내 진고개의 오명을 말끔히 씻어냈다. 이 공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하수 토목 공사로 서울시 하수도의 효시가 됐다.

1922년 8월 동아일보는 일본 상점의 손님 중 조선인은 8할이나, 조선 상점의 일본 손님은 5푼에 불과하다는 조사를 발표했을 정도로 일본인들은 혼마치를 중심으로 조선의 상권을 하나하나 접수해 나갔다. 사진 = 진고개 혼마치 풍경

1922년 8월 동아일보는 일본 상점의 손님 중 조선인은 8할이나, 조선 상점의 일본 손님은 5푼에 불과하다는 조사를 발표했을 정도로 일본인들은 혼마치를 중심으로 조선의 상권을 하나하나 접수해 나갔다. 사진 = 진고개 혼마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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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개에서 혼마치로

진흙도 없고, 고개도 없어진 땅이 더 이상 ‘진고개’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은 1914년 이곳의 지명을 혼마치 도오리(本町通)로 바꾸고, 전기를 들여오기 시작하면서 이 일대는 불야성의 번화가로 완벽하게 거듭났다. 근대적 상품과 친절한 점원, 화려한 거리와 세련된 풍류를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진고개는 당대 조선인들에게는 선망의 공간이자 한 번 들어서면 빈털터리가 되어 나서는 최첨단 소비지대였는데, 1922년 8월 동아일보는 일본 상점의 손님 중 조선인은 8할이나, 조선 상점의 일본 손님은 5푼에 불과하다는 조사를 발표했다. 크고 화려한 것에 대한 선망과 허영에 대한 지적이 늘면 늘수록 진고개는 모던 신세대의 ‘근대 소비문화’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1930년 10월 진고개에 들어선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을 중심으로 늘어선 카페, 레스토랑, 극장은 ‘양과자점서 커피와 비스킷을, 카페에선 켈피스나 포트톰, 홍차를 즐기고, 백화점에 들러 양장 한 벌 해 입는’ 모던 의·식 문화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벼슬길 한 번 못 오른 가난한 선비들의 남촌이 도성 안 북촌 사람들 모두가 선망하는 공간으로 재편되는 동안 조선은 일본에 국권을 피탈당하고, 조선상권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다. 본정통도, 진고개도 이젠 더 이상 불리지 않는 지명이 됐지만, 여전히 이 일대의 지명에는 일제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있다.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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