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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춘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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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해진다. 스멀스멀 눈이 감긴다. 급기야 눈꺼풀엔 잔뜩 무게가 실린다. 아무리 들어올리려 용을 써봐도 소용없다. 그래 너란 놈이 찾아오고야 말았구나. 봄 볕이 따사롭다 했더니 춘곤증이란 녀석이 여지없이 찾아왔다.

예년 같으면 3월초께부터 그러했을 것이니 올해는 이 놈도 좀 게으름을 피운 것 같다. 그렇잖아도 얄궂은 날씨가 봄을 시샘하며 한동안 으스스한 기온이 계속 된데다 천지를 덮은 미세먼지라는 불청객이 계절을 구분하지 않고 기승을 부렸으니 말이다.
춘곤증은 계절의 변화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다는데 겨우내 움츠렸던 몸이 날이 풀리자 신진대사가 활발해지면서 느끼는 일종의 피로 증상이다. 그야말로 일시적으로 생기는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다.

춘곤증을 못이겨 사무실 한켠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신세지만, 한번쯤 낮잠을 흐드러지게 자봤으면 하는 곳이 있다. 서울 성북동에 자리한 최순우 옛집이 바로 그곳이다.

우리에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혜곡 최순우 선생(1916~1984)이 살었던 이 집은 1930년대에 지어졌다는데 조선시대 경기지방의 전통한옥 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멀쩡하던 집도 하루 아침에 헐리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는 개발 공화국에서 이 집은 용케 살아남았다. 알다시피 선생이 돌아가시고 재개발 위기에 몰렸던 이 집은 내셔널트러스트라는 시민단체에서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 보전한 시민문화유산 1호다.
'ㄱ'자와 'ㄴ'자 형태의 안채와 바깥채가 소담스런 정원을 사이에 두고 고즈넉한 정취를 발한다. 이 집에서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방마다 걸려있는 편액인데 특히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뒤뜰로 연결된 사랑방에 걸려 있는 '오수당(午睡堂)'이라는 현판이다. 말 그대로 낮잠을 자는 방이라는 뜻인데 혜곡 선생은 단원 김홍도의 서첩에 있는 글씨를 판각해서 이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오수노인이라 칭했던 선생은 이곳에서 집필을 하다가 잠깐 낮잠을 취했다고 한다.

내리쬐는 봄볕을 받으며 정원에 있는 나무들 사이로 살랑이던 봄바람이 어느샌가 사랑방으로 들라치면 이곳이 곧 산중이니 어찌 낮잠을 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수를 청하기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라 할만하다. 혜곡 선생은 그래서 사랑채 안뜰 쪽에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속(두문즉시심산ㆍ杜門卽是深山)'이라는 편액을 달아 번잡함을 달랬나 보다.

그러나 이런 소소한 행복을 꿈꾼 게 언제 적인지 모를만큼 아득하다. 시절이 이렇게 수상한데 한가한 소리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기력이란 말로 대치되는 춘곤증은 꼭 계절 탓만은 아닐 터. 국정농단 사태가 반년 넘게 몰아넣은 이 혼란과 삼년의 기다림 끝에 뭍으로 나온 세월호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무기력함이란. 일단락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진행형인 이 사건의 결말까지 기다리기엔 빼앗긴 일상이 간절하다.

김동선 기획취재부장 matthew@asiae.co.kr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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