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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휩쓴 대하소설 여성작가 '완월당'신드롬

최종수정 2016.04.22 16:53 기사입력 2016.04.22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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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스토리텔링 - 조앤 롤링 뺨치는 인기, '완월회맹연'을 쓴 이씨부인


'완월회맹연'을 쓴 조선의 작가 이씨부인.<그림 오성수 화백>

'완월회맹연'을 쓴 조선의 작가 이씨부인.<그림 오성수 화백>



“여보. 내가 군수로 있는 김제의 기막힌 이야기요. 당신이 이것을 한번 잘 정리해주오.”
남편 안개(1693-1769)는 편지를 보냈다. 아내는 그 내용을 정리해서 다시 남편에게 보내준다. 이런 사연이었다.

김제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저마다 흩어져 100가구가 넘던 곳이 10가구로 줄었다. 고씨 성을 가진 선비 부부도 굶주림을 못견뎌 서로 헤어지기로 하였는데 문득 아내가 말하였다. “지금부터 빌어먹어야 할 것이니 집안에 있는 짐승을 돌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오래된 가견(家犬)을 죽여 하루라도 그대를 배불리 먹일까 합니다.” 그때 남편이 말하기를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우리의 부덕을 모르겠는가. 나는 차마 그리 할 수는 없소.”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그대의 선한 심성을 어찌 제가 모르겠습니까. 제가 부엌 안의 기둥에다 개를 헐겁게 매어놓을 터이니, 그대는 밖에서 그것을 눈 딱 감고 당기시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차마 아내에게 개를 잡으라고 말할 수 없었던 남편은 “알았다”면서 밖에서 새끼줄을 당겼다. 그리고 들어가 보니, 개가 아니고 바로 그의 아내가 목줄에 매달려 숨져 있었다.

남편은 이 내용을 정리하여 상소로 올린다. 이 비극적인 스토리를 정리한, 안개의 아내는 완월당(玩月堂) 이씨(1694-1743)였다.

18-19세기 영국에 제인 오스틴(1775-1817, ‘오만과 편견’의 작가), 샬롯 브론테(1816-1855, ‘제인 에어’의 작가), 그리고 해리포터 시리즈를 낸 조앤 K 롤링에 매료된 사람이라면 이제 18세기 조선의 여성소설가 완월당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그녀는 180권(요즘 방식으로 편집하면 최소 20권)에 달하는 방대한 대하소설을 썼다. 조선에 전문적인 소설가라니, 그것도 남성도 아닌 여성 소설가라니... 그녀의 존재는 많은 학자들조차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만큼 낯설고 신비했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잠깐 그 시절의 거리를 기웃거려보자.

16-17세기 왜란과 호란은 이 땅의 여성들에게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겁탈과 능욕이 지나간 뒤 사내들은 여성들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과 연민을 보여주는 대신, 그녀들을 규방 속에 깊이 가두는 질곡(桎梏)의 사회시스템을 굳혀 나갔다. 당시 조선은 당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세상의 가치는 혼란스러웠다. 벼슬을 꿰차고 솟아오르던 사내들은 어느 사이 급전직하로 추락하여 집으로 돌아오거나 귀양길을 걸어갔다. 속으로 차오르는 고독감과 지적 열정을 감당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밤마다 독서에 탐닉하며 좌절감을 달랬다.

세상에 대한 갈증과 규방 속의 갑갑함, 그리고 갈피 잃은 사회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을까. 요즘의 일일 드라마와도 같이 엿가락처럼 이어지는 장편소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한자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독자들이 많았기에 국문으로 씌어진 것들이었다. 이런 흐름을 타고 소설을 베낀 필사본을 빌려주는 세책가(貰冊家)들이 등장했다. 책을 빌려가는 고객은 주로 도시의 부녀자들이었고 궁중여인들도 즐겨 읽었다. 당시의 필사본 책들 말미에 적힌 글귀들을 보자.

“보신 후 유치하지 말고(슬쩍 하지 마시고) 본댁으로 전할 차(책가게에 돌려주세요).”
“부디 낙장은 마옵소서.(책 찢어내지 마세요.)”
“오자도 많고 낙서도 많은데 세책비(貰冊費)만 높구려. 세책으로 놓으려면 깨끗한 것을 놓으시오.”
이런 글귀 이외에도 세책가들이 적어놓은 대여료 숫자도 보이고, 또 책을 종이 노끈으로 묶어둔 것도 있다.

이같은 소설 열풍의 중심에 한 여성이 있었다. 18세기 초 인기작가로 떠오른 완월당이 그 사람이다. 전주 이씨로 알려져있는 이 여인을 ‘완월당’으로 호명한 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객기이다. 그러나 나름으로 짐작의 근거가 아예 없지는 않다. 당시 그녀의 베스트셀러 작품이었던 180권 짜리 대하 장편소설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은 줄여서 ‘완월’로 불리기도 했다. 이 소설을 쓴 부인은 당시 관행 탓에 ‘익명’에 숨어있어야 했지만, 당시 한양의 맹렬독자들은 그녀의 존재를 알음알음으로 알고 있었다. 호사가들의 습관이 그렇듯 인기 작가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혹자는 그녀를 ‘완월부인’이라고 호칭했고 혹자는 아예 호처럼 ‘완월당 이씨’로 부르기도 했다.

완월 애독자들은 세책가나 같은 취향의 친구들을 만나면 ‘완월부인이 새로 납셨나?“라며 신간을 탐색했다. 대표작을 작가의 호칭에 쓰는 일은 그리 낯설지 않지만 그녀가 완월부인이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완월회맹연‘의 의미는 ’달놀이 모임에서 결혼을 맹세하다‘는 뜻이다. 거기에서 완월(玩月)만 떼내면 ’달구경‘이다. 달은 여성을 의미하는 은유이기도 하고(음양의 이치를 따지는 조선에서는 특히 이런 비유가 울림이 있었다), 이 세상과는 다른 별세계(別世界)를 가리키기도 했다.

완월회맹연은 중국 명나라를 배경으로 갈등의 가정사를 다룬 대하소설로, 악인과 선인의 캐릭터가 뚜렷하게 대비되면서 사건으로 뒤엉켜 독자를 사로잡는 뛰어난 작품이다. 유교사상과 충효, 우애를 강조하고 있지만, 갈등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다채로운 면모와 긴박한 상황 전개가 TV 주말드라마 못지않게 '중독성'이 있는 소설로 평가된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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