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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 잠시 살았다는 말(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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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살았다'라는 말을 새롭게 만난다.

살았다.
죽었다의 반대로 쓰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그 말이, 사실은 많은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너, 나하고 살래? 그렇게 물을 때의 '산다'는 것은, 죽는다의 반대쪽에 있는 말 이상으로 적극적인 어떤 선택을 품고 있다. 우리는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바닥을 밟고 서서도 강하고 당찬 삶을 산다. 그 사는 일이, 나 하나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어 그것이 어느 기간 동안 내 삶의 전체를 이루는 그때, 우린 너와 '잠시 살았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전에도 살았고 그 이후에도 살았지만, 네가 있어야만 되는 나의 삶. 네가 있어야 숨쉴 수 있고 네가 있어야 꿈꿀 수 있던 삶. 우리 삶 중에는 그런 부분도 있는 게 아니던가.

사는 것은 터전의 문제이다. 서러운 셋방살이도 셋방에 들어앉은 삶이다. 타향살이는 타향 언덕에 등 뉘고 자는 사람의 삶이다. 군대살이는 스스로의 뜻과는 비교적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징집되어 총검을 닦는 내무반에서 모포를 덮고자는 바로 그 삶이다. 시집살이는 뭐던가. 한 남자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에 딸린 집 전부를 껴안고 살아야 하는 옛 여자의 조건들이 아니었던가. 뒷방살이는 가정이나 조직의 실력자 자리에서 밀려나 눈치 보며 살아야 하는 서러운 말년의 삶이다. '터전'을 붙인 '살이'들은 왜 이리 서럽고 고단한가. 어려운 터전에서 살아내야 하는 그 숨차고 힘겨운 기분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말은, 너와 살았다는 말이 담은 의미를 또렷이 환기시켜준다. '너'는 바로, 어느 기간 동안의, 나의 터전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를 집 삼아, 둥지 삼아, 혹은 언덕 삼아, 기둥 삼아 그렇게 살았다. 너는 바로 나의 집이었다는 사실. 그것이 '함께 살았다'의 의미가 아닌가. 이 생각만 하면 다른 살이에 못지않은 서러운 감회가 떠밀려 나온다.
살았다는 말은, 목숨을 영위하는 엄숙한 명제같지만 사실은 밥하고 반찬하고 밥상에 둘러앉아 밥먹고 키스하고 사랑하고 일하고 여행하고 또는 미워하고 슬퍼하고 술마시고 잠드는 일까지, 생의 자잘한 지문으로 남겨지는 모든 것이 들어가 앉는다. 당신과 살았다는 말은, 흘러가는 목숨의 일부를 기적처럼 함께 꿰차고 두 개의 생이 하나의 생으로 겹쳐지던, 그 이상한 자아소멸의 기억을 참 소박하게도 새겨놓은 그 말이다. 사랑할 수 있는 집구석이 있어야 가능한 말, 그 집구석이 남아 있어도 떠나갈 수 있는 잠정적인 말, 사랑했다는 말보다도 더 슬픈 말, 너와 잠시 살았다는 말.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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