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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 아프고 화나고 미안해(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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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는 마냥 잘되어가는 사랑을 노래하는 걸 즐기지 않는다. 신이 '사랑'이란 물건을 인간에게 내주면서 붙인 '사용설명서' 그대로, 적절하게 해내간 사랑은 노래를 작사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나 보다. 뭔가 뒤틀리고 잘 안되고 어이없고 괴롭고 슬프고 민망하고 부끄럽고 잘 끊어지지도 않는 사랑이라야, 리듬을 타기 쉽다. 나는 이걸 '불량끼와 상처의 유통'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머리 속에 몇 권의 교과서를 꽂아놓고 살아가면서 건전함과 적절함에 공을 들이고 또 그것에 박수를 치지만, 그것 만으로 살 수는 없다. 우리에겐 정말 양념같은 '불량끼'가 필요하다. 유신 시절 노래테이프 맨 마지막에 들어있었던 건전가요를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그 희망적이고 발랄한 노래는 귀찮게 느껴질 만큼 재미없고 건조하고 지루하다. 거기엔 불량끼가 주는 긴장감과 드라마틱한 모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기쁨만큼 슬픔과 아픔이 필요하고 사랑만큼 미움과 분노가 필요하다.
상처의 유통은 유행가의 생명력이다. 노랫말은 상처를 노출하고 대중은 그 상처를 받아먹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로 감정이입해서 노래에 숨어 '발언'하는 걸 즐긴다. 유행가의 상처는 대중과 피가 통하는 감정의 혈관이다. 그게 없어도 노래는 되지만 왠지 싱겁고 깊이가 없어 보인다. 그 많은 유행가들이 비련에 목청을 돋우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프고 화나고 미안해.

참 기가 막힌 고백이다. 저 세 개의 엇갈리고 뒤엉키는 감정을 나는 '세컨드 기분'(김경미시인의 ‘나는야 세컨드’에서 말하는 그 세컨드) 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의 당당한 '갑'과 '을'이 되지 못하고, 제3의 존재인 병(丙)이 되어 사랑의 주변을 맴돌면서 질투하고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세컨드다. 물론 여기서 세컨드라 함은, 1대1 관계의 바깥에서 그 중 한 사람과의 사랑을 갈구하는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물론 세컨드가 '갑'에게서 더욱 많은 사랑을 받아내는 경우도 많지만 문제는 그게 사회적으로 혹은 공식적으로 공인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사랑의 '실속'과 '형식적 광휘'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요컨대 세컨드는 폼이 안난다.

세컨드가 아픈 이유는, 사랑의 대상인 '갑'의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아픔을 가져와 내가 대신 앓는 이 마음은, 세컨드가 사랑의 밀도에 있어선 '을'보다 결코 못지 않다는 점을 웅변한다.

세컨드가 화나는 이유는, 사랑의 대상인 '갑'을, 사랑의 경쟁자인 '을'이 감히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을'은 그를 아프게 했을 뿐 아니라, 내가 만나야할 시간을 빼앗아가고 내가 쏟을 사랑의 자리에 자신의 것을 퍼부음으로써 세컨드의 사랑을 방해해왔다. 세컨드의 자질이나 성질에 대해 가지는 일반적인 편견은, 바로 저 분노를 섬세하게 이해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컨드가 미안한 이유는, '갑'의 아픔을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고통을 치료하려면 반드시 '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을'은 늘 세컨드의 능력 밖에서 그를 무력하게 하는 존재이다.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저 원초적 조건에 대한 씁쓸한 환기가 세컨드의 미안함에 배어있다.

세컨드 기분이 울림있는 노래가 되는 것은 그 상처와 모순이 극적이고 강렬해서 공감을 끌어내는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기분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노래가 하나의 힘있는 연대감이 된다. 슬픔은 스스로 발 아래 바퀴를 달고는 대중 속으로 쭉쭉 미끄러져 들어간다. 요컨대 '아화미 현상'은 비련이 자아내는 슬픔의 3형제다. 노래를 한번 들어보라.

왜 이렇게 아무 말이 없니 괜찮은 거니
눈빛만 봐도 널 알수 있어서 마음이 아파

왜 이렇게 아무 말이 없니 괜찮은 거니
니 눈을 보면 다 알수 있는데 마음이 아파
걱정이 되잖아 그 사람 때문에
전처럼 자주 보지 못해서
내가 더 그 사람 미웠어

말을 해봐 울지 말고
너 이렇게 아파하지 말아 줘
늘 뒤에서 널 맴도는
이런 나도 있잖아

왜 그렇게 눈물만 흘리니 무슨 일이니
니 곁에 내가 있을수 없어서 마음이 아파
속상해지잖아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 하는 너를 보는게
아프고 화나고 미안해

말을 해봐 말을 해봐
울지 말고 어서 내게 말해봐
늘 뒤에서 널 맴도는
이런 나도 있잖아


아프고 화나고 미안해 - 하은의 노래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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