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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칼럼]신해철, 그가 마중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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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다, 라고 아버지들은 말한다. 그런 말조차 조심스럽다. 그들끼리, 술 기운에, 동병상련으로, 울컥해서 털어놓는다. 온 가족을 숨죽이게 했던 호통소리. 모르는 것 없었고, 존재만으로도 든든했던 아버지. 나이 든 아버지들이 떠올리는 그들의 아버지는 이제 없다.

22년 전 젊은 가수가 아버지를 노래했다. 노래 말이 이 시대의 우울한 아버지상과 빼어 닮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들이 회고하는 과거의 그 아버지다. 그러나 노래는 반전한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가족에게 소외 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 거린다/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노래의 종반, 커버린 아들이 늙은 아버지를 마중 나간다. 몇 년 만인가. 어둠이 깔리는 골목길에 부자의 애잔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할 말은 길어진 그림자 뒤로 묻어둔 채/우리 두 사람은 세월 속으로 같이 걸어갈 것이다.'

신해철이 쓰고, 곡을 만들고, 노래한 '아버지와 나(1992년 넥스트 1집)'다. 7분48초의 길이에 중저음의 내레이션만으로 이어진다. 노래라기보다 아버지를 향한 회한의 독백으로 들린다.

신해철의 사망을 들은 것은 지난주 LG와 넥센의 플레이오프 1차전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딸이 먹먹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대, 오빠는 어릴 때부터 광팬이었는데, 지금쯤 펑펑 울고 있을 거야. 오빠로부터 감염된 슬픔이 묻어났다.

다음 날 페이스북에서 '이건 아니잖아'라고 짧게 쓴 아들의 절규 같은 글을 읽었다. 페북에 고양이 사진이나 올리던 녀석이 몇 번이나 신해철을 보낸 충격을 표출하고 있었다. 마왕은 진정한 우상이었다고, 그들이 말하는 '빠돌이'였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신해철을 알기는 하지만 '개성이 강한 뮤지션' 정도다. 아들도 까칠한 편이니 좋아할 만했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열렬한 추종자로 성장기를 그와 함께했다는 내밀한 역사는 미처 몰랐다. 후배가 카카오톡에 올린 '아버지와 나'를 들으며 신해철의 초상에 아들이 오버랩됐다. 나는 아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버지에게 아들은 무엇인가.

신해철은 노래에서 말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비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고. 맞다. 한국의 아버지들이 대체로 그렇듯 나도 수줍다. 아들과 가슴을 열고 대화한 적이 있었던가. 그의 노래, 그의 꿈, 그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보려 했는가. 대화는 언제나 실용적인 주문과 단답으로 끝났다. 술 적당히 마셔라, 운동 좀 해라. 그러면 아들은 예, 예, 짧게 대답했다.

세대의 갈등은 역사와 함께한다는 얘기가 있다. 고독은 아버지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21세기를 사는 아버지들에게 또 다른 짐이 얹혔다. 100세 장수의 축복이 두렵고 버겁다. 노쇠한 몸으로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젊은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비난을 무릅쓰면서 오늘도 바람 부는 거리를 헤맨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스물 넷 젊은 나이에 주름진 아버지를 마중 나간 신해철의 깊은 속을 다시 생각한다.





박명훈 주필 pmho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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