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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퇴계를 전송할 수도 없었던 두향(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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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86)


[千日野話]퇴계를 전송할 수도 없었던 두향(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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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박하게 임지를 옮기면서 이황은 강선대의 두향을 잊었을까. 물론 그녀에 대한 언급이나 그녀를 의식한 행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두향이 준 도수매와 매화 등을 수레에 싣고 청풍으로 갔다. 이승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는 이제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랑의 등대였다. 낙매일의 사랑례(禮)를 치른 후, 결별한 이황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해 5월 중순에 공무로 청풍 관아에 갔다가 이튿날 아침 단양으로 돌아오면서 강선대 부근에서 읊은 시 한 편이 있다.

흰 구름은 푸른 산에 가득하고
붉은 해는 맑은 물에 쏟아지네
위와 아래 텅 비어 밝은 그 속에
나뭇잎 배 하나 떠도는구나

백운만취령 홍일도청류(白雲滿翠嶺 紅日倒淸流)
상하허명리 소요일엽주(上下虛明裏 逍遙一葉舟)
흰색과 녹색, 그리고 붉은색과 청색. 이렇게 고운 원색을 뿌려놓고 하늘을 비춘 수면 위로 나뭇잎같은 배 하나가 떠돈다. 흰 구름과 푸른 산의 이미지는 남성이고 붉은 해가 쏟아진 맑은 물은 여성이니, 이것은 저 선암에서 말한 운우지정이 아닌가. 상하가 텅 비어 맑은 것은 하늘과 강이 서로 얼비치는 것이지만, 퇴계의 마음과 두향의 마음이 아닌가. 그 속으로 천천히 드나드는 저 일엽편주는 퇴계의 그리움 외에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심정은 절절하였지만 표정은 무심하고 행동은 삼엄했다. 오직 목민만을 생각하며 살았으리라. 그 여름과 가을, 곡식이 자라 수확이 있었고 백성들은 그를 어버이처럼 따랐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농수(農水)를 공급하는 것 이상으로 근본적으로 이들을 허덕이게 하는 세금과 부역을 덜어줄 정치적인 방책이 그에겐 없었다. 조정이 그런 것을 들어줄 건전한 판단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인 이곳을 목민관의 힘으로 바꿔보기에는 역부족을 느꼈다. 게다가 그는 오랜 정쟁의 덫을 헤쳐나오느라 지쳐있었다. 9월의 성묘는 조상들에게 그가 가야할 길에 대해 묻고 싶었던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10월에 들려온 임지 변경 소식은 단양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어떤 탈출구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백성들이 몰려나와 눈물로 그를 전송했다. 그들의 손을 잡으며 이황도 눈자위에 흐르는 뜨거운 것을 느꼈다. 이 고단하고 가엾은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곤경과 고난을 헤쳐갈지 측은한 마음이 몰려왔다. 그 백성들 중 하나에 두향도 끼어 있었다. 그의 삶을 바꿔준 한 여인. 사랑의 힘을 느끼게 해준 한결같은 마음. 그러나 작별의 인사도 없이 그는 떠났다. 쓸쓸하게 단양의 산과 물들을 돌아보며 말을 타고 한 시절을 지나갔다.

두향도 이황이 단양 임지를 벗어나 청풍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전송길에 나갈 수 없었다. 다시 보지 않겠다는 그의 엄명을 어길 수도 없었지만 그를 보면 다시 무너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한 마디 마음을 기댈만한 기약도 없이 사라져간 그에 대해 원통스럽고 서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설마 떠날 때는 말없이 가지 않으리라, 그런 기대를 하며 기다렸는데…. 그녀는 단양에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사랑이 이렇게 사람을 재갈 물리는 것이라면 대체 왜 시작을 했단 말인가. 강선대에 앉아 이호대를 바라보며 두향은 떠난 이황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고려 때 정추(鄭樞)가 쓴 시를 읊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차가운 등잔 외로운 베개, 눈물이 끝없이 흐르네
비단 장막에 은 병풍, 어젯밤의 꿈이네
몸 사랑으로 님을 섬겼더니 끝내 버림받았구나
비단부채여 가을바람 원망한들 무엇하리

한등고침누무궁(寒燈孤枕淚無窮)
금장은병작몽중(錦帳銀屛昨夢中)
이색사인종견기(以色事人終見棄)
막장환선원서풍(莫將紈扇怨西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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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
일러스트=이영우 기자 20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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