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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퇴계 주위에 먹구름이 일다(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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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85)

[千日野話]퇴계 주위에 먹구름이 일다(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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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향이 놀란 눈으로 지함을 쳐다본다.
“어머나, 그러셨군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이 아닌가 걱정되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단연(短緣)이 제게도 해당되는 것이겠지요.”
“두향에게 전혀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으면서 한 사람의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그 일방적 연애에 대해 의심해 왔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풍설(風說)을 들은 뒤 다시 내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두향이 물었다.
“제가 어찌하면 좋을지요?”
“아아. 그대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으로 맺기엔 불가능한 대상이라 생각하였기에, 다른 인연으로 맺으면 어떨까 고민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해낸 건 의매(義妹)입니다. 제 누이가 되어 오누이로 서로 의지 삼으면 어떨지요.”
“아아, 의매!” 두향이 소리쳤다.
“의매라….” 공서가 그 낯선 낱말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두향이 하늘 벼랑에 나앉은 외로운 처지이니, 양오라버니가 있는 것이 어찌 도움이 되지 않겠소. 의지가지 없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으니, 이 또한 아름다운 풍경이라 할 만합니다.”
“숙부의 누이가 된다면 제겐 고모가 생기는 셈이니, 지란지고(芝蘭之姑)가 아니겠습니까?”

산해의 말에 좌중은 웃었다.
“그렇게 보살펴 주신다면 더없는 은혜일 것입니다.”
두향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이산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빗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 여름에는 비가 잦았다. 이황이 조성한 인공보(湺)인 복도소에는 물이 들어찼고, 농수로를 통해 인근의 논과 밭이 적셔졌다. 단양은 3년간의 고질적인 가뭄과 홍수로 농사를 망쳐왔는데, 그해 들어 벼와 밀, 콩과 수수가 자랐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던 백성들의 얼굴이 다소 펴졌다. 8월에 이황은 단양향교에서 석전(釋奠)을 집행했다.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해 4성10철72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단양에서 이런 의식을 주재한 까닭은, 기민(饑民) 구제와 함께 문풍(文風)을 드높여 백성들의 의식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가을이 되자 그는 고향 안동을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커졌다. 9월에 휴가를 내고 성묘를 다녀온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사단(事端)이 생겼다. 그의 넷째 형 이해(李瀣ㆍ1496~1550)가 청홍도 관찰사(충청감사)로 부임하면서 그의 관할에 형제가 있는 것을 꺼려, 다른 곳으로 임지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온계(溫溪)공이라 불리는 이해는 퇴계의 숙부 이우(李?)가 “형님은 두 아들을 잘 둬서 돌아가셨지만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그 둘 중의 한 명이다. 다른 한 명은 물론 퇴계이다. 사람들은 이해와 이황을 가리켜 금곤옥제(金昆玉弟ㆍ금 같은 형과 옥 같은 아우)라 불렀다. 그 형이 관할 상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이해는 최고 언관(言官)인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당시의 권력 중심이었던 이기(李?)가 우의정에 발탁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미움을 샀다. 그래서 외직으로 돌게 되는데, 황해도 관찰사와 청홍도(충청) 관찰사가 그것이다. 넷째 형으로서도 한창 불안한 시절이었다. 그때 단양군수였던 이황은 풍기군수로 옮기게 된다. 그해 10월의 일이다. 이후 이해는 결국 큰 변을 당한다.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았고 무고사건에 연루된 구수담 일파로 지목되었다. 주위에서는 굴복하면 죄를 모면할 수 있다고 권했으나 이해는 거절했다.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믿어 갑산에 귀양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했는데,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던 길에 쓰러져 죽는다. 형의 이 같은 허무하고 비참한 죽음은 퇴계의 인생관에도 다시 큰 영향을 미친다.(온계공 이해의 묘갈명은 막내 아우인 퇴계가 썼는데, 그 비장하고 처연한 문장이 가슴을 울린다) 형이 죽은 뒤 이황은 벼슬을 내던지고 안동의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고 만다. 정치에 대한 절망과 혐오가 짙어졌던 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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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
일러스트=이영우 기자 20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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