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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이지함, 연모의 정을 고백하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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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84)

[千日野話]이지함, 연모의 정을 고백하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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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어떤 사람이 비단치마 조각을 가지고 와서 외상 술값을 갚았다 합니다. 그런데 그 비단을 가져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칼에 찢긴 치마와 맞춰보니 꼭 맞는 게 아닙니까. 비단을 가지고 온 사람은 바로 육손이 집안의 종이었고요."
"아아" 좌중은 함께 소리쳤다.

"여인은 며칠 뒤 동리사람들에게 술집을 접게 되어 공짜로 술을 대접하고 싶다는 기별을 보냈지요.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며 그 자리에 참석했다 합니다. 물론 육손이와 김인산도 나왔지요. 그녀는 신부의 성장(盛裝)을 하고 등장해 사람들을 향해 절을 한 뒤 이렇게 말했지요. '제게 천추의 한이 있으니 이 억울함을 동리 어르신들이 들어주십시오. 저는 저기 육손이 어른의 조카의 신부였습니다. 첫날밤 괴한이 급습을 하여 제 치마 반쪽을 도려내는 일이 일어났고 저는 누명을 쓰고 파혼을 당했습니다. 저는 그 괴한이 저와 아무 관련이 없는 자임을 알았으나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어 한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술집을 하면서 제 치맛자락을 잘라간 이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여기 제 원래의 치마와 도려내간 치마조각이 꼭 들어맞습니다. 이 치마조각을 가져온 자도 지금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한 사람이 일어나 부리나케 줄행랑을 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음.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다시 두향이 물었다.

"육손이는 사태를 그제야 짐작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달아난 종을 찾아내 몰래 심문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안주인께서 시킨 일입니다. 조카가 장가를 가면 집안의 살림이 크게 줄어들어 남은 자식들을 성가(成家)시키는 일이 어려웠기에 이를 막으려 일을 벌이신 것입니다.' 육손이는 이후 그 종에게 다른 죄를 씌워 죽였고, 그 여인과 인산의 혼인을 다시 추진하여 성사시켰습니다. 그는 아내와 따로 초당에서 기거하였는데, 밤중에 불을 질러 놓고는 측간에 갔습니다."

"아, 그럼 결국 아내도…."

"예. 육손이는 아내의 상을 치른 뒤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네 어미는 큰 죄를 지었기에 내가 죽였다. 그러나 아내를 죽인 자가 어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겠느냐.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자 하니, 나를 찾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는 금강산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육손이대사가 되셨군요. 파란만장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선비의 공부를 그대로 하면서 수도를 하고 계셨던 거군요. 선암사의 선(仙)자를 파자하면 인산(人山)이니 이 또한 우연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문득 이지함이 말했다.

"두향은 사랑이란 것의 요체(要諦)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요."

"사람으로 태어나 자기 밖의 다른 사람에게서 하늘의 뜻을 느끼는 것이 아닐지요."

"하늘의 뜻이라…. 하늘의 뜻이라면 두 사람이 모두 공평하게 느끼고 그것을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지요. 혼자서 사랑을 감당하기만 한다면 어찌 그게 하늘의 뜻이라 하겠습니까?"

"하늘이 맺어주었다 하더라도 선연(善緣)으로 길이길이 맺어준 것이 있고 잠시 꽃처럼 피었다 화르륵 지는 단연(短緣) 만을 허락한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게 찾아온 더할 나위 없는 인연을 분수에 맞게 누리는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평등한 것이고, 그 본성을 누릴 기회를 얻는 것 또한 공평하기를 바라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닐지요? 사랑이 서로 간의 최선(最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어느 순간에든 상호애(相互愛)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이즈음에 들어 더욱 모르겠습니다."

두향의 눈빛이 쓸쓸해지자, 이지함은 이렇게 말했다.

"기실, 나 또한 두향을 처음 본 순간부터 깊이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서원(誓願)하기를 아내 이외에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는 것은 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향을 본 뒤에 생겨난 심란(心亂)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 고통받아왔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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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일러스트=이영우 기자 20w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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