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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스토리]삼전도비, 치욕보다 더 부끄러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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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이제 곧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다. 며칠 후 퇴임하는 대통령의 기록물은 국가기록원에 보존되고, 특별히 법이 정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꺼내 보거나 훼손하지 못 한다. 이제 모든 공과는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다. 역사는 가고, 다시 역사의 평가가 온다.

비록 치욕의 역사라 해도 증거를 인멸할 수는 없다는 걸 가르쳐 주는 상징물이 있다. 어떤 상징물이나 기록을 없앤다 해서 치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 치사한 역사보다 더 가증스러울 만큼 부끄러운 인멸의 역사를 가르쳐 주는 상징물은 서울 잠실 석촌호수 서호 한편에 자리한 '비석'이다. 유리지붕 건조물 아래 높이 570cm, 너비 140cm의 크기로,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로 불린다.
삼전도는 예전 도성에서 송파에 이르는 한강 나루가 있던 곳으로 1950년대까지는 나룻배가 다녔다. 나루터는 1980년대 한강개발로 사라지고, 롯데월드 건설 당시 늪지를 호수로 조성해 호수공원으로 활용중이다. 비석 옆에는 이수가 없는 귀부가 하나 더 있다. 비석 뒷면에 새겨진 대로 본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다. 앞면은 만주어가 몇 자 남아 있으나 대부분 마모돼 있다. 자연적인 유실이라기보다는 인위적 훼손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삼전도비가 겪은 수난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9일 찾은 삼전도비 앞에는 노인 한분이 다리 쉼을 하고 있었다. 비석 아래 호수변 산책로에는 할머니 여럿이 웃음꽃을 피우며 산보하는 모습도 보였다. 비석의 동측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층 건물이 한창 공사중이고 북측으로는 호텔과 백화점이 비석을 덮칠 것처럼 짓누르고 있는 형상이다. 마치 비석은 초고층 현대식 건물에 죄지은 하인 마냥 낮은 자세로 서서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다. 몹시 측은한 느낌이다. 도대체 저렇게 괴롭히고 학대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비석이 가장 근래에 받은 수난은 지난 2007년 2월 붉은 글씨로 뒤덮힌 사건이다. 당시 앞뒷면에 '철'자와 '거'자 등이 쓰여져 두달 가까이 복귀하느라 애를 먹었다. 비석은 조선 인조 17년(1639년)에 세워졌다. 이후 고종황제는 청일전쟁(1895년, 고종 32년) 당시 청의 세력이 약해지자 비석을 강물에 수장시켰다. 이를 일제가 1913년 한강에서 건져내 다시 세웠다.
1955년 문교부는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땅에 매몰시켰다. 그러나 1963년 대홍수로 모습이 드러나자 지금의 석촌공원(석촌동 289-3)으로 옮겨 세웠다. 하늘도 역사의 교훈으로 삼으라고 인멸을 허용치 않아서였을까? 당시 공원에 세운 까닭은 송파대로 확장공사로 비석을 놓을 위치가 마땅치 않아서였다. 석촌공원은 주택가 한가운데 어린이 놀이터로 쓰이고 있다. 과거 비석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를 찾아 비석 자리를 물으니 공원내 가로등이 서 있는 곳이었다고 가르쳐준다. 비석은 2010년 4월 문화재청이 현지답사, 역사 고증 등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보호각을 설치해 옮겨놓았다. 그러나 이 또한 정확한 위치는 아니다. 송파구청 문화재과 담당자는 "정확한 위치는 지금보다 남서측 10m가 맞으나 그곳에 설치하면 물속에 잠기는 까닭에 가장 가까이 세웠다"고 설명했다.

애초에 비석이 세워진 연유는 이렇다. 조선 전기까지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해 후금을 세우고,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해왔다. 급기야 이들은 나라 이름을 청이라 칭하고 조선에 신하의 예를 요구하면서 국교가 단절됐다.인조와 반정세력은 친명책으로 일관하자 1636년 청나라 태종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을 침공했다.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거하던 인조는 결국 청나라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변 삼전도 나루터에 와서 강화협정을 맺었다. 협정을 맺던 1637년 1월30일의 기록은 처참하다.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치욕적인 날로 기억된다. 남한산성 행재소를 나온 인조는 곤룡포 대신 쪽빛 평민복을 입고 맨발로 삼전도의 청 태종 군막까지 걸어왔다. 이어 인조는 군막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이마를 땅에 대고 조아림)로 항복을 표시했다.

청이 물러난 후 조선은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차가운 뿌리에 다시 봄이 오도다. 우뚝한 돌비석이 큰 강의 머리에 섰도다. 삼한에는 만세토록 황제의 덕이 남으리로다"로 끝나는 글귀를 만주문자와 몽골문자(앞면), 한문(뒷면)으로 음각된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다. 비석은 거북모양으로 조각된 받침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을 세우고 위에는 용문양의 이수로 장식된 형태다. 비석 옆의 귀부는 비석을 세우다 다시 제작되는 과정에서 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비석의 글자는 대부분 훼손돼 있다. 그러나 비석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선명하다. 치욕과 더불어 치욕의 역사도 간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럽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만주족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이제, 비석의 만주어는 더 이상 쓰여지지 않는다. 강대했던 만주족도 나라가 몰락하면서 백성만 곤궁해졌다. 삼전도비 앞에서 두 민족의 영욕을 떠올리며 다시 불행한 역사의 전철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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