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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詩]김광규 '빨래 널린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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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詩

산책길 옆에 퇴락한 기와집/ 오늘도 비어 있는 듯/ 마당과 옥상에 널어놓은/ 얼룩덜룩 빨래들 /늘어난 셔츠와 해어진 바지/ 빛바랜 치마와 꼬마 팬티/ 크고 작은 양말들이/ 가끔 바람에 흔들리며/ 빈집을 지키고 있다/ 주인은 어디서 고단한 하루를 견디는지/ 애들은 어느 아가방에 맡겨 놓았는지/ 낮에는 알 수 없지만/ 저녁 때는 단촐한 식구들/ 모여서 살고 있는 듯
김광규 '빨래 널린 집'

옛날영화 '해바라기'. 군대에 간 뒤 전쟁통에 행방불명된 남편 안토니오를 찾아 소련땅을 샅샅이 뒤진 지오바나가 마침내 이 남자가 살고있다는 집을 찾았다. 그 집에는 젊고 예쁜 소련여인 하나가 빨래를 널고 있다.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희디흰 빨래. 내 남편과 저 여자가 이곳에서 단란하고 아늑한 생활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지오바나는 억장이 무너진다. 빨래 뒤에 선 여인 마샤는 혹시 이 사람이 자기의 행복을 깰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김광규의 빨래는 빈집의 백서(白書)같은 것이다. 낮에는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밤이면 뿔뿔이 헤어졌던 식구들 돌아와 빨래로 널린다. 빨래들끼리만 하루 종일 서로 바람에 부비는 온전한 가족이다. 소피아 로렌은 그 빨래만 보고서도 꿀같은 사랑을 감지하고 미친 듯 질투하지 않았던가.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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