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질투 사이
강만수씨나 다케우치가 비판적으로 언급했던 '질투의 경제학'을 진짜 경제학으로 세우려고 작심한 사람이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일 것이다. 그는 성장과 불평등 사이의 관계를 낙관적으로 조망한 쿠즈네츠 이론에 의문을 표시한다. 지난 3세기 동안의 20개국 이상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우위에 있음을 밝히고, 이것을 경제 불평등 심화의 근거로 삼았다. 이것을 근원적이고도 효과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선 글로벌 자본세를 거둬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낸다. 부자의 경제적 집중이 심화되고 있으니 세금으로 그것을 조정해야 빈자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피케티의 생각은 '질투의 경제학'이 아니라 '경제학의 질투'일지 모른다. 경제학이 부자를 질투함으로써 불평등을 비경제적으로 해결하려는 감정적 잣대를 들이미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부자를 선망하는 '질투'의 긍정적 동력을 재발견한 디턴이야 말로 '질투'를 경제의 에너지원으로 읽어낸, 진정한 의미의 '질투의 경제학'일 수 있다.
2001년 4월26일자 이코노미스트지가 논쟁을 붙인 '배고픔의 경제학'과 '배아픔의 경제학'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오래된 고민을 드러낸다. 전 세계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공동체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로버트 웨이드 런던대 경제학 교수의 경고에 대해 이코노미스트지는 부자를 끌어내리기 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일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논박했다. 배고픔도 배부른 사람을 선망하는 '질투'를 부를 수 있고, 배아픔도 배부른 사람에 대해 불쾌해지는 '질투'이니, 어떤 질투에 힘을 실을 것인가가 인류가 내내 고민해가야 할 질긴 화두임에 틀림없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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