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지친 표정의 김씨는 1984년 11월 민정당사 점거 농성 때의 일화로 아버지를 회상했다. 당시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 3개 학교 학생 260여명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민정당사 점거 농성을 벌이다가 연행된 일이 있었다. 김 전 총장은 학생들을 제적하라는 전두환 정권의 압박에 맞서 눈 하나 꿈쩍 않고 버텼다.
온 몸으로 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뿐이었다고 한다. 다른 교수들과 학생들에 대한 조치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교수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는 상을 내리치며 화를 냈던 그다. 학생들을 제적시키는 것은 사회적으로 사형을 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제자들의 죽음 앞에서 밥이 넘어가느냐는 질책이 이어졌다. 김 전 총장은 그 자리에서 끝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해방 뒤 1949년까지 중국에 남아 중국국립동방어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그 해 귀국해 고려대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조교수에서 부교수, 교수를 거쳐 1982년 총장에 오를 때까지 30년 넘게 중국 근대사를 맡아 강의를 했던 김 전 총장은 학교 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우고, 중국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한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 맺기에도 발벗고 나섰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김대중 정권 때까지 국무총리를 비롯한 관직 제의를 수차례나 거절한 그는 자유, 지성, 정의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보냈다. 아들 김씨는 "아버지께선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서재에서 책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는데, 평생 동안 단 하루도 어김이 없었다"며 "화투나 장기, 바둑, 낚시 등도 즐기지 않으셨고 백화점이나 상점에서 돈을 내고 물건을 산 일이 일생에 열번도 안될 만큼 꼿꼿한 삶을 사셨다"는 말로 아버지의 일생을 전했다.
김 전 총장은 1920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나 신의주동중학교를 졸업했고, 미국 하버드대 교환 교수, 고려대 총장, 사회과학원 이사장, 중국 베이징대 명예교수 등을 지냈으며 독립운동유공표창과 국민훈장 모란장, 건국훈장 등을 받았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1호실, 발인은 10일 오전 9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이다.
조유진 기자 t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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