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 이동·정보 확산 속도만큼 공포감 커
미국 스타트업의 자금줄이었던 실리콘밸리은행(SVB)부터 크레디스위스(CS), 도이체방크까지 이른바 ‘뱅크데믹(은행+팬데믹)’ 우려의 중심에 섰던 세 은행에는 ‘실시간 뱅크런’, ‘시장의 비이성적 공포’ 등 특징적인 현상이 발견됐다. 이는 위기를 맞은 각국 정부가 신속한 대응에 나서게 된 이유로 꼽힌다.
뱅크데믹, 속도와 경로 달랐다
이번 위기는 속도와 경로가 과거와는 확연히 달랐다. 안전자산의 상징인 미 국채에 대부분의 자산을 투자해온 SVB가 실현되지 않은 장부상의 손실로 불과 36시간 만에 파산한 것이 대표적이다.
SVB는 사태 첫날인 지난달 9일에만 총자산 4분의 1에 달하는 420억달러(약 55조6000억원)가 빠져나갔다. 다음날에는 뱅크런 규모가 1000억달러에 달했다. 이후 3월 말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마이클 바 연방준비제도(Fed) 금융감독 부의장이 "놀라운 속도와 규모"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단시간에 대규모 뱅크런이 일어난 것은 소셜미디어(SNS)와 디지털 뱅킹이 큰 역할을 했다. SNS를 통해 빠르게 퍼진 정보, 불안 심리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뱅킹을 통해 뱅크런으로 번졌다.
SVB 사태 직후 폐쇄된 뉴욕 시그니처은행 역시 3월10일 하루에만 총 예금의 20%상당인 100억달러가 이러한 디지털 뱅킹으로 빠져나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금융위기 당시에는 고려할 요소가 아니었던 SNS의 뉴스 확산과 스타트업 경영자들의 발작적인 반응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분석했다.
CS의 경우 사우디국립은행(SNB)이 추가 재정 지원에 선을 그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시장의 불안 심리를 촉발한 사례다. 당일 주가는 즉각 두 자릿수 급락했고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몇 배로 뛰었다. 자산 이동, 정보확산 속도가 빨라진 만큼 공포의 감염도 삽시간에 번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은행권 위기 상황에서 투자자와 예금자들이 과거보다 자산 부실 가능성 등에 훨씬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했다고 평가했다.
뱅크데믹 정점 찍은 ‘비이성적 시장’
여기에 뱅크데믹 우려에 정점을 찍은 것은 독일 최대 투자은행인 도이체방크다. 은행 건전성을 위협하는 큰 부실이 없었음에도 3월 말 도이체방크가 한순간에 위기설에 휩싸인 것은 그만큼 은행권을 주시하는 투자자들의 불신이 깊고 민감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도이체방크 주가가 급락하자 앤드루 쿰스 시티은행 애널리스트는 "비이성적 시장 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고 진단했다. CS가 발행한 채권이 인수 과정에서 휴지 조각이 되자 막연한 공포가 시장을 휩쓸었고, 다음 사냥감으로 도이체방크를 택했다는 설명이다.
비이성적 공포와 불신은 어려운 약한 고리부터 끊어내기 마련이다. 공포가 번지는 과정에서 각종 정보가 쏟아지지만, 각각의 진위를 가늠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이 ‘민스키 모멘트(과도한 부채로 인한 경기 호황이 끝나고 자산가치가 폭락하는 순간)’를 맞이하는 시대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간 가디언은 "은행은 대출 기간과 예금 기간의 불일치로 인해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업종"이라며 "은행은 생존 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대형 투자은행인 CS는 다른 은행보다 더 엄격한 당국의 감독을 받아왔고 SVB는 유동성 및 자본 규제를 준수했지만, 지급 능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빠르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디지털화 등으로 금융시장 환경이 빠르게 변화했음에도 이를 제어할 제도적 장치가 미흡했다는 점도 이번 사태의 문제점으로 손꼽힌다.
뱅크데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뱅크데믹 공포는 당국의 빠른 개입 이후 위기설에 휩싸인 은행들이 새 주인을 찾으며 서서히 가시는 모습이다.
하지만 시장에는 여전히 경계감이 남아 있다. 당장 이번 사태로 인해 은행권 규제가 강화되고 신용경색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누적된 긴축 통화정책의 부담에 대출 위축 등이 더해질 경우 경기에는 한층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이어진 저금리 환경에서 불어난 가계 대출, 부동산 등 레버리지 문제 역시 언제든 터질 수 있는 뇌관으로 꼽힌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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