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소수, 더 나은 비주류 세상
1995년 장애인 시설 입소 후 15년 간 생활
손 들고 있어라 시키고 욕설 듣기도
2010년 시설 나와 혼자서 생활
활동 보조사와 함께 장도 보고
"잃어 버린 가족 찾고 싶어요"
[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12일 정오 무렵 서울 종로구 혜화동 노들장애인야간학교는 곧 있을 야외 수업으로 왁자지껄 했다. 출입문과 복도 사이 휠체어를 탄 학생들도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순간 어디로 가야 할 지 고민하는 사이, 활동 지원가로 보이는 한 중년 여성이 말했다. "아, 인터뷰하러 오셨구나. 경남씨 여기 인터뷰하러 오셨어요!"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김경남(43)씨가 마스크를 낀 채 나타났다. 나에게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함께 갔다. 5번이라고 적힌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니 책상 위엔 경남씨가 한글 쓰기 연습을 해온 10칸짜리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나, 너, 우리, 학교, 혜화역, 노들야학이 순서대로 적혀 있었고 경남씨는 혜화역과 노들야학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경남씨는 곧 바로 어디로 휴대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 일 하시나봐요"라고 말했다. 잠시 뒤 함께 인터뷰를 하기로 한 천성호(49) 교사 대표가 "경남씨 무슨 일이예요?" 하며 교실에 들어섰다.
1995년 경남씨는 철원에 있는 한 장애인 시설에 입소했다. 10대 시절 영등포 신길동에서 길을 잃어버렸던 경남씨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 했다.
우리나라 장애인 시설은 대부분 사람과의 단절을 야기한다. 폐쇄된 공간에서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도록 하기 때문에 선택을 하는 일 자체가 어렵고 시설 외 공간에서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고함을 많이 지르고, 말 안 들으면 날 보고 손 들고 있어라 그랬고. 욕도 하고."
그렇게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는 시설에서 빨래를 걷는 일 등을 했다고 전했다. "공부는 사무실에서 불러서 하거나 물리치료실에서 공부를 시켰어요."
시설에서 같이 생활해 온 희영언니와 2010년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처음부터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발달장애를 가진 경남씨가 야학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노래를 부르거나 왔다갔다 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소리 지르며 욕을 하기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날 인터뷰에서 본 경남씨의 모습으론 상상하기 어려운 회상이었다. 보조사들의 도움으로 노들야학에 오던 경남씨는 이제 혼자서도 지하철을 타고 야학에 출석한다.
경남씨에게 요즘 행복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나는 일이 행복해요. 저상버스 이거 들고 나가서 이렇게 지키는 것"이라며 옆 의자에 놓여 있던 팻말을 가리켰다. '저상버스 휠체어 전용 공간'이라고 적힌 판은 저상버스를 확보해 달라는 내용으로 장애인 인식 개선 사업의 일환이다. 서울대병원 앞에서 팻말을 6시간씩 들고 있는 일이 그는 힘들어도 행복하다고 했다.
김치와 파김치를 좋아하는 경남씨는 받은 월급으로 활동보조사와 함께 장도 보고 밥도 지어 먹는다. 급여가 들어온 날은 우유와 소시지도 먹는다며 웃어 보였다. 노래 수업을 가장 좋아한다는 경남씨.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묻자 표정이 밝아졌다. "소양강 처녀 제일 좋아하고, 자옥이도 좋고. 가수는 현철."
경남씨는 한글 쓰기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로 자신의 이름과 '노들야학'이라고 했다. 왼쪽 공책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야학에 나올 수 없게 되자 집에서 경남씨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글 연습을 한 것이다. 총 네 권에 달했다. (사진=이현주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경남씨의 꿈을 묻자 책상에 놓여 있던 지우개를 만지작 거리면서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경남씨는 "강화도에 가고 싶다. 한 번도 안 가봤는데, 한 번도 안 가봐서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남씨는 "엄마를 찾고 싶다"고 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 싶다고. 그래서 이번 기사에 자신의 사진도 공개 하겠다고 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엄마가 보고 싶어요. 꼭 나중에 알려주세요."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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