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수거라고 쓰다가, 이건 너무 행정적인 용어라고 생각했다. 버리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그것을 담아가는 관(官)의 입장에서 만든 말이다. '수거'를 지우고 분리배출이라 쓴다. 쓰레기를 한 가지로 매도하지 않고 적어도 두 가지 정도로 나눠 버릴 만큼 우리의 삶이 세심해졌다. 분리된 쓰레기에는 물건들의 종말에 대해서도 배려를 하기 시작한 인간들의 자부심이 서려 있다.
당신과 나눴던 수많은 식사와 음주의 기억들은 분리배출이 필요하다. 새벽에 마스크를 끼고 이 봉지를 수거해가는 사람들은 식사를 하는 사랑과 음주를 하는 사랑의 결과물들을 분리하고 있다. 크리넥스에 묻어나온 당신에 대한 그리움과 찢어진 종이 조각에 남은 당신의 이름 등속은 재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냥 버리기로 했다.
가장 담기 어려운 건 역시 당신의 그리움이다. 나를 보며 그토록 행복해했던 눈빛을 냉동시켜 비닐에 담는 일은 정교한 기술을 요구한다.
하나의 시절이 쓰레기 봉투에 담기는 건, 어쩌면 불순하고 불결하게 떠돌아 다니는 미적지근한 감정의 공해들을 처분하는 지혜이기도 하리라. 한 시절을 버리며 버석거리는 비닐의 소음 안에 문득 어떤 할 말이 남은 듯한 당신을 얼핏 바라본다. 이제 그 봉투를 여민 매듭을 잡고 저 멀리로 투기하기 전에.
빈섬 이상국(편집부장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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