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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8장 추억과 상처 사이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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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8장 추억과 상처 사이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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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으로 소리없이 걸어가는 사람 그림자.
하림의 심장은 무엇으로 꽉 움켜쥐듯이 여지없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누군가? 이 밤중에..... 정말 히스클리프의 유령이라도 나타났단 말인가?’
하림은 침을 꿀꺽 한번 삼키고는 잔뜩 긴장한 눈으로 앞서 가는 어둠 속의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림자는 부지런히 앞만 보며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림자는 하림과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림이 보고 있는 것은 그림자의 등쪽이었다. 희미한 초승달 달빛이 무대의 조명처럼 그의 등 윤곽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제 아무리 사나운 짐승이라도 사람만큼 잔인하고 적대적인 동물도 없다는 것이다. 막상 어둠 속에서 마닥뜨리고 보니 그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까 남경희가 화실을 나올 때가 아홉시 경이었으니 아직 초저녁이라면 초저녁일 것이었다. 그러나 사방은 어둡고 바람까지 불고 있어, 한밤중 같았다.
한밤중 같은 둑길을 혼자 걸어가는 사람 그림자.
귀신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달리 피해서 갈 길도 없었다. 하림은 애써 침착한 마음을 유지한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림자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림자는 매우 규칙적으로 절룩거리며 걸었기 때문에 한쪽 어깨의 흔들림도 매우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림은 순간 그게 어쩐지 눈에 익은 동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장.....?’
하림은 다시 찬찬히 그림자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틀림없이 이장 운학이었다. 운학이 저만큼 앞 어둠 속에서 절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혀 뜻밖의 사실에 하림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가 왜.....? 이 시간에 혼자.....?’
하림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눈을 찡그렸다. 처음의 놀람이 가시고 나자 불안한 궁금증이 번개처럼 뇌리를 파고 들었다.

하긴 아직 열시도 되지 않았을 터이니 어디 가까운 곳에 다녀오는 길일 수도 있었고, 우연히 나왔다가 되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장이니까 이 부근은 훤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괜히 놀라고 야단을 치는 자기가 이상했으면 이상했지 이장은 그저 그냥 그쪽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는지 모른다. 하기야 둑길이란 게 세 논 것도 아니고, 낮엔 다들 흔히들 다니는 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요즘 같은 봄날엔 쑥을 캐러 나온 아낙네들이 오후 늦게까지 어슬렁거리는 것도 본 터였다.
하지만 하림은 곧 머리를 흔들었다.
둑길은 외길이었다. 이쪽으로 가든가, 저쪽으로 가든가 둘 중의 하나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말은 조금 전까지 그가 자기들, 즉 하림과 남경희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땅에서 솟아나지 않은 이상 서로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하림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가 처음부터 자기들 뒤를 미행하고 있었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은 잠시 후 현실로 나타났다. 그림자가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림은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천천히 그림자를 향해 걸어갔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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