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한번 쉰 다음 계속해서 말했다.
“가이드가 <한국군 증오비>에 나오는 그 글을 다 읽어주고 나자 우리 아버진 그 앞에서 그만 털썩,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고 말았다고 해요. 자신이 평생 믿어 왔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이 하루아침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드셨던 거죠.”
하림은 이마를 잔득 찌푸린 채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슴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독한 소주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다.
“우리 아버진 비록 그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그때 그 이야기는 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 비슷한 일들이 여러 군데서 일어났지만 다들 전쟁 중이라 그냥 지나쳐갔다고 해요. 베트콩이라 불리는 자들은 아무리 죽여도 상관없는 적이었으니까요. 지금 이라크에서 어린 미군 아이들이 저지르는 일과 다름없었죠. 다들 무지했고,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 말짱한 정신으로 자신들이 싸웠던 곳으로 다시 찾아갔고, 바로 그 비석의 끔찍한 내용을 보아야했던 것이죠. 처음엔 아버진 그게 누군가가 조작한 거라며 믿지 않으려 하셨대요. 그러다가 그들이 모두 베트콩과 관련된 적군이라고 하다가 결국은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셨죠. 우리 아버진 선량하고 원칙적인 분이라 그 후 무척 괴로워하셨답니다. 술이라도 자시면 혼자, 우리가 그때 몹쓸 짓을 저질렀어, 하곤 중얼거리곤 하셨죠. 생각해보세요. 자기 청춘의 자랑스런 추억들이 있을 수 없는 죄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말이예요. ”
하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재로 이라크 전쟁에 참가했던 많은 미국 군인들이 지금도 그런 정신 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림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 중에는 자살자도 많다고 했다.
열심히 이야기 하느라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입술은 바삭 타있었다.
“차 한잔 더 드릴까요?”
하림이 말했다.
“됐어요. 물이나 한잔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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