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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정호승 11번째 시집 '여행'의 종착역 '마음의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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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책과 사람]정호승 11번째 시집 '여행'의 종착역 '마음의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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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번째 시집 '여행'을 내놓은 정호승 시인은 지금 '여행' 중이다. 시집 출간 이후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시인의 외유는 곧 외국 여행으로 이어질 참이다.

그러나 시인은 외유자체 시적 여정은 아니라고 말한다. 특별한 모색이나 탐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의 그저 그런 휴식이라는 설명이다. 삶이 여행이라고 비유한 것을 감안하면 전혀 의미를 두지 않는데 놀랍다. 굳이 삶이 '여행'이라는 비유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관념이다. 여느 시인이라면 익숙한 관념은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도 그는 맞섰다.
시인은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 듯 여행길로서의 인생을 단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며 "그래서 우리가 도달하려는 영혼의 세계가 어디인지 끝까지 탐구해보고 싶었다"는 말로 창작 배경을 설명한다. '길'이란 단순히 인마와 운송수단이 지나다니는 지표상의 공간을 말하는 건 아니다. 생로 병사의 과정인 '인생', '운명', '과정'으로도 표현한다. 이번 여행은 시인에게 있어 "종착역도 없는 역"(나의 기차)으로 향해 있다. 출발은 "배 고프면 컵라면 하나 사먹"(여행가방)을 만큼 가볍다.그렇다고 정호승은 상처와 눈물, 외로움의 근원을 정면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시인은 결코 현실을 떠날 수 없다.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초기 작품인 '슬픔이 기쁨에게', '황색의 예수'부터 살펴야만 설명될 수 있다. 삶은 숙명이다. 시인은 결코 그 숙명으로부터 유리될 수 없으며, 어떤 본질도 현실에서 출발한다. 나의 시가 비록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읽혀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이에 현실문제에 시선이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에 대해 시인은 나즈막하고, 간결한 목소리로 "시는 은유와 침묵의 언어다. 또한 시인은 시로써 말해야 한다. 또 직접 시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답변을 대신한다. 모든 시인은 시로써 말한다는 대명제 앞에 서 있다. 시인 또한 예외 없다.
"울지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수선화에게 전문>

정호승의 모든 시는 '수선화에게'로 귀결되는 듯 하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항상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비록 시인은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여행)고 설파한다. 그러나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결국 "사람의 마음의 설산" 즉 외로움으로의 귀환이다. 그것은 세상의 거친 형국속에서 "살아 있을 때 짊어진 모든 슬픔을 그 나무가지에 매달아놓고 떠나"(슬픔의 나무)기 위해 "용서할 수 없는 용서를 용서해야하고 분노에 휩싸이면 죽은 사람처럼 죽어야" 가능한 일이다.
[책과 사람]정호승 11번째 시집 '여행'의 종착역 '마음의 설산' 원본보기 아이콘


"눕는 것은 다만 나무의 그림자일 뿐/나무는 눕지 않는다/우는 것은 다만 나무에 기댄 사람들 뿐/나무는 울지 않는다(중략)그동안 내게 돌을 던지던 당신에게 내가 빵을 던지지 못 해 미안하다/당신이 내게 돌을 던질 때/내가 십자기를 던지지 못 해 미안하다" (신책 중 일부)

우리가 갖는 슬픔, 눈물이라는 병리현상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희망에 목숨 걸지도 않고, 아둥 바둥 각박하게 사는 것 또한 허락치 않는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 중에서 가장 큰 죄악은/희망을 잃는 것이라고/신은 인간의 잘못을 다 용서해주지만/절망에 빠지는 것은 결코 용서해주지 않는다고/희망이 희망의 그림자에게 조용히 말할 때/나는 너의 손을 잡고 흐린 외등의 불빛마저 꺼져버린/막다른 골목길을 돌아나온다"(희망의 그림자 중 일부)

"나는 물 위를 걸은 예수의 흉내를 내다가 익사한 적이 있다(중략) 내가 고통받을 때마다 당신도 함께 고통받는다는/당신의 말이 나는 아직 의심스럽다/나의 불행을 통하여 남이 위로받기를 원하며 밥을 먹고/흰 거울을 보며 푸른 넥타이를 매기 전에/좌변기에 즐겁게 앉아 있으면/오늘 아침에는 불행한 사람도 불행하지 않은 사람도/미운 사람도 고운 사람도 없다"(아침에 쓴 편지 중 일부)

대신 세상에 대해 시인은 "낮은 데로 더 낮은 데로"로 내려가 "인간의 낙엽으로 다시 썩을 수 있게 되길"(미소) 바란다. 비록 시인의 언어가 자비로운 부처님, 사랑에 찬 예수님도 치유하지 못한 세상에서 시대의 상처를 어루만질 콘텐츠는 못 될 망정... 시인이 '산책이며 여인숙에 서의 하룻밤'으로 설파한 삶에 여전히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여행'/정호승 시집/창비 출간/값 8000원>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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