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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내내 맴도는 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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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사촌 B가 불쑥 말을 꺼냈다. "형. 형은 외숙모한테 잘해야겠더라. 외숙모는 형을 가장 마음에 두고 살아온 거 같아. 자식같이 의지하고 믿어 왔나봐. 왜, 옛날 호리병 거인 있잖아? 자신을 병 속에서 꺼내줄 사람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앞으로 꺼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죽여 버릴 거라고 다짐했던 그 거인의 마음이 그랬잖아? 외숙모가 그런 심정을 겪은 거 같아. 형에 대해서…."

B는 외숙모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을까.
1950년 전쟁 와중에 남편을 잃었던 스무 살 그녀는, 신혼 몇 달의 기억과 누런 물이 든 전사통지서를 품고 자식도 없이 평생 청상(靑裳)으로 살았다. 11년 뒤 내가 태어나고, 서른한 살 그녀는 남편의 기색을 닮은 어린 생질을 뒤숭숭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어린 자식들과 어머니의 새 식솔들이 밥그릇 싸움을 벌이는 전쟁통이었던 우리 집에서, 나는 입을 하나 더는 셈으로 자주 외가로 피난을 갔다. 마침 그 집은 자식이 끊긴지라 절간같이 적막했다. 외숙모는 나를 핏줄같이 거뒀다. 외할머니와 외숙모는 외손 하나를 놓고, 안방에서 재우자, 건넌방서 재우자며 신경전을 벌였다.

마흔한 살. 그리고 열한 살. 외숙모의 방에서는 모과 향기 같은 게 났다. 젊은 여인의 몸 냄새였을까. 아랫목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불기운에 잠이 들 무렵, 등 뒤에서 외숙모가 비녀를 꽂은 머리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다시 내가 문득 새벽녘 잠귀로 듣는, 비녀 꽂는 소리로 이어졌다. 그때 어느새 나가서 감고 온 머리에서 나는 젖은 냄새가 코끝으로 전달되어 왔다. 밤과 아침은 그사이에 있었다. 옥수수를 삶아 주며 일본어와 한자를 가르친 건 초등학교 때였고, 영세골 뒷산에서 들꽃을 꺾어 꽃꽂이를 만들어 준 건 중학교 때였고, 한밤중 초가지붕 처마에 사다리를 받치고 올라가 잠을 자러 들어온 새들을 함께 잡던 때는 고등학교 때였다. 그 15년 동안 나는 외숙모의 슬하에서 자란 셈이다.

2013년 5월. 매일 가는 선방(禪房)에서 시린 무릎으로 돌아와, 벤자민이 무성한 아파트 거실에 앉아 지나가는 기차 소리를 듣는 외숙모는, 문득 생질조카를 떠올렸을까. 여든셋. 이 외로운 길에 동행해 주지 못하는, 쉰셋의 무정을 괘씸히 여겼을까. 저를 아들처럼 키웠는데, 나쁜 놈. 슬며시 돋아나는 그런 부아를 지우며 거실을 닦던 걸레에 더욱 힘을 주었을까. B의 말이, 내내 맴돈다.
<향상(香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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