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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선 칼럼]사회 정의에 반하는 '일자리 대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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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지난주 '일자리 대물림'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렸다. 울산지법은 16일 정년퇴직 후 폐암으로 사망한 현대자동차 직원 황모씨 유족이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장례비와 위로금 등 금전적 보상을 규정한 단체협약은 유효하다고 봤다. 하지만 '업무상 재해로 사망하거나 장애로 퇴직한 조합원의 유족을 특별 채용한다'는 96조의 법적 효력은 인정하지 않았다. 일자리 대물림 보장 조항은 무효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인사에 대한 사항은 사용자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애초 단체협약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건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라는 민법 103조에 근거한 판단이다. 재판부는 "단협을 통해 채용 세습을 제도화하는 방식은 사실상 일자리를 물려주는 결과"라며 "사회의 정의 관념에 배치된다"고 했다. 일자리 대물림을 '구직 희망자를 좌절시키는 반사회질서 행위'로 규정한 셈이다.
울산지법의 판결은 산재 사망 또는 장애 직원에 대한 특별대우 조항에 한한 것이다. 확정 판결도 아니다. 법적 다툼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판결의 함의를 감안할 때 많은 대기업이 적용하고 있는 '직원 자녀 우선 채용' 조항의 타당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업무상 재해자에 대한 배려마저 무효라면, 직원 자녀 우선 채용 관련 조항은 모두 다 무효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경우 정규직 신규 채용 시 면접 대상자의 25%를 정년퇴직자나 25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자녀에 할당하고 있다. 5%의 가산점도 준다. 엄청난 특혜다. 기아차 노사도 지난달 장기 근속자와 정년퇴직자 자녀에게 1차 면접 때 10%, 2차 면접 때 5%의 가산점을 주기로 합의했다. 한국GM, 현대중공업, SK에너지 등 많은 대기업의 사정도 비슷하다. 2011년 기준 200대 기업 중 노조가 있는 157곳의 32.5%인 51곳이 단협에 직원 자녀 우선 채용 조항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자리 대물림은 다른 구직자의 취업 기회를 빼앗는 부도덕한 행위다.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이기적 행태다. 비정규직 입장에서는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여겨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을 부추기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기아차 노사가 직원 자녀 우선 채용에 합의한 지난달 비정규직 직원 한 명이 분신자살을 기도한 것이 단적인 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가 '정규직 채용 세습은 반노동자적 행위'라고 비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정규직과 청년 백수가 넘쳐나는 등 고용 사정은 불안하다. 일자리를 나누려 하기는커녕 일자리 지키기를 넘어 일자리 대물림까지, 대기업 거대 노조의 욕심이 지나치다. 고용 세습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현대차 노조만 해도 전년도 순이익의 30% 성과급 지급, 대학 미진학 자녀의 취업 지원금 1000만원 등 요구 사항에 한도 끝도 없을 지경이다. 회사 측 책임도 크다. 일감 몰아주기로 부와 경영권을 편법으로 물려주는 등의 구린 데를 덮으려 노조의 불합리한 요구에도 적당히 타협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회사와 노조 모두 판결의 의미를 새겨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한다. 현대차를 비롯한 대기업 노조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조합이기주의에 빠져선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사회질서와 정의에 반하는' 일자리 대물림 관련 조항을 스스로 폐기하는 결단을 내려야 옳다. 직원 자녀 우선 채용이 산재로 숨지거나 퇴직한 조합원 가족의 생계대책을 위한 것이요, 대상자도 소수로 문제 될 게 없다며 유야무야 넘어가려 해선 안 될 일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노조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나아가 노동 운동의 정당성마저 잃게 된다.





어경선 논설위원 euh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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