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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메신저]지팡이를 든 할머니의 패션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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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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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델은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모델은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였다. 일순 장내가 숙연해졌다. 윗몸이 약간 구부정했으나 모델이 입고 있는 엷은 핑크색 드레스는 한없이 우아해 보였다. 할머니는 한걸음씩 발길을 떼며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그 박수는 모델이 무대를 빠져나갈 때까지 이어졌다. 지난 30일 서울 삼성동 섬유회관 이벤트 홀, 뉴시니어라이프가 마련한 '노년층'의 시니어 패션쇼에서였다.

모델은 올해 74세의 박윤수 할머니였다. 그녀는 1993년 5월 14일 목동 아파트 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목과 허리를 다쳐 각각 2번의 수술을 받았으나 점점 더 허리가 굽어져 결국은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조차 없게 됐다. 수영과 물리치료를 꾸준히 했지만 그 어느 것도 굽은 허리를 펴주지는 못했다.
"2012년 9월 우연히 TV에서 시니어모델교실에 관한 방송을 보게 됐습니다. 비슷한 또래들이 활기차게 워킹하는 모습을 보며 '아 저곳에 가면 나도 똑바로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하는 느낌이 왔습니다" 자식들이 응원해주며 챙겨준 수강료를 손에 쥐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힘들게 뉴시니어라이프 교육장을 찾았다. 교육장에 가는 것조차 참 힘이 들었다.

허리가 거의 90도로 굽어있어, 그녀의 첫날 수업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3걸음 밖에 걸을 수 없었다. 그래도 화려한 음악과 멋진 무대와 또래들이 함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무척 즐겁고 자신감에 고집까지 생겼다. 두 번째 시간에 5걸음, 3번째는 8걸음ㆍㆍㆍ. 놀랍게도 굽은 허리가 어느 정도 펴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놀랐다.

그런 힘든 시간들 뒤, 그녀는 드디어 멋진 시니어패션모델이 되었다. 20대 때 신었던 빨간(굽낮은)힐,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헤어메이크업ㆍㆍㆍ. "내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는 더 큰 무대에서 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자신 있게 워킹하고 싶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날 무대에 오른 모델들은 50을 넘긴 지긋한 아줌마, 아저씨,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이다. 얼굴과 목에는 굵은 주름이 나이테처럼 자리를 내고, 허리는 힙과 구분도 안 되며, 새하얀 백발로, 살아온 이야기를 온 몸으로 웅변하는 80을 훌쩍 넘긴 모델들이 있는가 하면, 반백의 노부부가 다정히 손을 잡고 지나온 부부의 역사를 하나의 하모니로 표현하는 부부들도 있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이혼율 1위로 1시간에 14쌍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을 정도인 이 나라의 많은 부부들에게 '행복한 부부'란 이런 것이라는 본을 보여주기도 했다. 탱탱하고 늘씬늘씬한 모델들의 쇼는 아니지만, 한사람 한사람의 '삶의 스토리'가 있는, 그래서 진솔하고 감동을 주는 무대였던 것이다.

백세(100세)시대에 돌입했다고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며, 신의 축복이다. 그러나 장수가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19년의 장애를 이겨낸 박윤수 할머니의 '기적'이나 백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엮어내는 삶의 스토리들을 보며, 노령사회를 어떻게 맞아야 할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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