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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김태정의 '호마이카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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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네가 낡아서가 아니야/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네가 이젠 무서워졌다/(.....)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불편해졌다/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시가 밥을 속이는지/밥이 시를 속이는지/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이 초라함이,/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너를 버려야 할까보다/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 2년 전인 2011년 9월에 타계한 시인의 시를 늦게야 읽는다. 밥상으로 옮겨간 자아와 죽기 살기로 대치하고 있는 시인을 만난다. 그녀는 2004년 창비에서 나온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남겼다. 서울 토박이었던 사람이 불쑥 땅끝 해남으로 내려간 것은 그해이다. 돌아갈 다리를 불태운 장수처럼, 내려올 계단을 부숴버린 암자의 수행자처럼, 시의 바다까지, 아니 시의 바닥까지 내려가며 익숙했던 도시를 향한 문을 닫아걸었다. 호마이카상을 갈아 치우겠다는 선언은, 자기를 갈아 치우겠다는 말이리라. 시가 인간을 궁하게 하는 현실을, 자신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은 맹렬한 고집이 시의 결을 돋운다. 자본주의가 밀어내버린 시의 자리, 밥의 법칙이 비웃는 시의 법칙. 암덩이를 껴안고도, 땅끝까지 찾아온 사람들에게 민들레처럼 쓸쓸하고 담담하게 웃었다는, 시의 기개(氣槪) 앞에 늦게야 여기 한 사내가 고개를 숙인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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