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의 밤/골뱅이 안주를 모르던 때/맥주 회사가 직영하는 생맥주 집을 모르던 때/흥남 철수 LST 타고 피난 온 사람이 만든 냉면을 모르던 때
을지로의 밤/늦은 지하철을 기다리며/청소년회관 방향 3번 출구 쪽엔/말 탄 장수가 밤새 홀로 호령하고 있지만/이 지하철도 없던 때
회관 강당에서 보았던 연극 한 편이 생각나는 거라/유진 오닐이었을까 아서 밀러였을까
연말이었고/늦은 밤이었고/눈이 내렸고/그냥 가만 함께 걷던 여고 2학년 K//을지로였고......
고운기의 '여자 K'
■ 시를 읽으면서 괜히 눈물이 핑 돈다. 여자 K가 내가 아는 그 여자가 아니겠지만, 나는 시인만이 지니고 있는 을지로 속으로 가슴 저린 고교생이 되어 들어간다. 기억이란 양파를 까는 일과 닮았고, 치매는 현실의 양파들이 다 까지고 깊이 숨어있던 한겹들이 드러나 현실처럼 되는 일이라던가. 어디 치매만 그렇겠는가. 기억들은 다 그렇게 그 시간의 폴더에 각인되고 내장되어 있지 않겠는가. 고운기는 을지로를 덮고 있는 기억의 외피들을 하나하나 벗긴다. 그랬더니 연극 한 편이 생각 난다. 청소년 회관 강당에서 공연했던. '밤으로의 긴 여로'(유진 오닐)이었거나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이 아니었을까. 연말 늦은 밤 눈 내린 을지로를 함께 걷던 여고 2학년 K. 그 기억까지 따라가 문득 서럽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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