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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스토리]순명비 유강원 "서럽고 슬픈 망국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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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다른 왕릉의 문무인석 표정이 옹혼하고, 위엄과 인자함이 깃들여 있는 것과는 달리 유강원 석물은 서럽고, 슬픈 표정이 담겨 있다.

다른 왕릉의 문무인석 표정이 옹혼하고, 위엄과 인자함이 깃들여 있는 것과는 달리 유강원 석물은 서럽고, 슬픈 표정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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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비 유강원 석물이 한곳에 모여진데는 한 사학자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지난 2001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된 유강원 석물은 현재 서울 광진구 능동로 216번지 어린이대공원 내 10.5㎡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서쪽 정문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산책로를 따라가다보면 금새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표지판 하나 서 있을 뿐 쉽게 눈길이 가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지나치기에 바빠 석물의 내력을 챙겨보는 이는 드물다.

서울의 수많은 유물, 유적들이 그러하듯 방치되고, 외면당한 것은 순명비 유강원 석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어린이 대공원의 석물은 조선 제27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순종(순종황제)의 황후 순명효황후의 능이었던 옛 유강원 터에 남아 있는 석물들이다. 유강원의 원 위치는 현재 팔각정 부근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어린이대공원의 여러 곳에 장식용으로 흩어져 있던 석물들은 2006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 복원됐다.
순명효황후는 고종 9년(1872)에 민태호의 딸로 태어나 고종 19년(1882)에 세자빈에 책봉됐으나 순종이 임금이 되기 전 1904년 33세에 사망했다. 세자빈은 시어머니되는 민비의 친척이다. 민비의 권력 강화를 위해 선택된 세자빈은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 1905년 유강원에 묘소를 마련했다. 순종 즉위 이후 '순명효황후'로 추증됐다. 따라서 황후의 무덤은 사망 당시 '릉(陵)'아니라 '원(園)'이었다. 현재의'능동'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다.

유강원은 순종이 세상을 떠난 1926년 지금의 남양주시 금곡동의 유릉으로 옮겨졌다. 그 뒤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가 사망하자 이 또한 함께 합장했다. 현재 어린이 대공원 내 유강원 석물은 이전 당시 그대로 버려진 것들이다. 대체로 무덤을 이장할 때는 기존 석물은 버리는게 일반적이다. 지금도 북한산 곳곳에서 무덤도 없는 곳에 버려진 석물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이장과 관련 있다. 버리는 이유는 옮겨가기가 용이하지 않아서다. '옛 무덤의 석물을 그대로 쓰면 자손에게 안 좋다'는 속설도 있다. 순명비도 그렇게 버려져 70여년간 짓밟히고, 온갖 치욕을 다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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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기의 석조물은 석등을 비롯해 문인석, 무인석과 말, 양, 호랑이 등 동물의 조각물로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조선 말 왕실의 석조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현재 석상 1, 고석 4기, 문인석 2기, 무인석 2기, 석호 4기, 석양 2기, 석마 4기,장명등 대석 1기, 죽석 5기, 석주 7기, 석주 7기, 동자석주 9기, 지석 1기 등이 남아 있다. 지석에는 "大韓 裕康園誌 光武八年十二月 日"라고 새겨져 있다. 석물 중 무인석과 문인석의 표정은 기존 문무인석과는 달리 침울한 듯, 화난 듯 힘이 빠져 있는 모습이다. 동구릉이나 기타 왕릉들을 지키는 문무인석의 표정과는 판이하다.

다른 곳의 문무인석은 함차고 ,웅혼하고, 위엄과 온화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에 대해 채원석 건국대학교 전 박물관장은 "아마도 망국이 비운이 석공에게도 스며든 탓이 아닌가 본다. 왕릉의 석물을 조각하는 석공이라면 당대에서 가장 뛰어났을 것이라는 건 상식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도 다소 일그러지고, 서러운 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 했다"고 설명한다. 석물은 모두 이곳에 모여 있지는 않다. 양 두마리가 빠져 있다. 지역 주민들은 세종대학교에 흩어져 있는 석물 중에 끼어 있는게 아닌가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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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물이 현재의 자리로 모여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채 전 관장이 2000년 10월께 유강원 석물을 조사해 광진구청, 서울시 문화재과, 어린이대공원 관리소 등에 보내 문화재 지정을 요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동안에는 공원 내 여기저기 방치돼 있었고, 내력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에 채 전관장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 조사, 지정 등을 건의하게 됐다.
이후 광진구는 서울시 문화재과에 건의하고, 서울시는 이에 문화재청에 제안해 2001년 7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러나 지정 당시 석물은 한군데 모아지지 못하고 여전히 여러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에 광진구 문화재 지킴이를 자처하는 한 지역민이 2003년부터 꾸준히 유강원 석물을 한 곳에 모아 보존하자고 여러 곳에 여러차례 건의해 2006년 서울시에 의해 현재와 같이 한 곳에 모아 복원 보존하게 됐다.

본래 능이 자리하면 사방 10리 안의 민가는 모두 이전되고 땅은 왕실 재산으로 편입된다. 그런 연유로 유강원은 한동안 황실 소유로 남아 있었다. 1926년 골프장 조성에 나선 일본 총독부가 영친왕에게서 빼앗아 갔다. 해방 이전까지 일본인들의 골프장으로 바꿨고, 일제는 석물을 여기저기 조경석으로 썼다. 이에 조선 국민들은 크게 분개했다고 한다. 이게 대한민국 1호 골프장의 역사며 유강원 석물의 수난사다.

해방 후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방치돼 거의 야산으로 변모했다. 그러다 미군들이 주말마다 골프를 치러 일본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 이승만 전 대통령에 의해 1954년 새로 리모델링됐다. 이를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에 앞서 북한에 갔던 밀사 이후락의 건의로 어린이 대공원이 됐다. 당시 골프장은 경기 고양시 원당으로 이전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한양 골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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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후락은 "북한 평양엔 어린이를 위한 공원과 기념관 등이 잘 조성돼 있고 규모도 엄청나더라. 우리는 제대로 된 어린이공원 하나 없는게 안타까웠다"고 보고했다. 이에 체제 경쟁에 혈안이던 정권은 긴급히 골프장을 이전시키고 공원 조성에 나섰다. 1972년 12월, 공사를 시작해 6개월만인 이듬해 어린이날에 맞춰 5월5일 개원했다.그러나 석물은 여전히 방치될 수 밖에 없었다.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 따위는 아랑곳 없이 정치와 비운의 역사에 참혹한 상태로 오랫동안 놓여있었던 석물은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 하고 있다. 채 전 관장은 "여러 고증과 증언들로 미뤄 공원 내 팔각정터로 추정될 뿐 정확한 사료를 찾지 못 했다"고 말한다. 또한 일부는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 우리의 문화적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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